그 상하이는 길고 긴 장강이 바다로 흘러들면서 생긴 거대한 충적토(沖積土) 위에 세워진 도시다. 강은 자신이 지나온 흐름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내는데, 그 강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 것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 강물의 장구한 흐름을 관찰한 사람들은 ‘과거’의 요소로 자신을 묶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탄’은 열려 있음의 상징이다. 게다가 그 앞에는 크기를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바다가 놓여 있지 않은가. 그 점에서 상하이 사람들은 도전의 정신이 강하다. 서광계가 가족을 인솔해 마테오리치를 찾
인천항이 오늘날의 이름을 얻기 전까지 줄곧 쓰였던 항구 이름이다. 제물(濟物)이라는 이름 자체는 그 쓰임이 본래 있는 단어에 해당한다. 물을 건넌다는 뜻의 濟(제)와 사람 아닌 다른 일반 물건을 뜻하는 物(물)의 합성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한자 쓰임으로 볼 때 여기서 物(물)은 곧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濟物(제물)이라는 한자 단어 자체는 ‘사람과 일반 물자들을 모두 건너게 해주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제물포 일대는 본래 고구려 때 ‘미추홀’, 백제가 이곳을 점령했을 때는 ‘매소홀’의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적어도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는 아버지가 서 있는 뜰을 지나다 두 번 혼난 적이 있다. 어른이 있으므로 고개를 수그리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공자는 아들을 불러 세운 뒤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시(詩)는 제대로 익혔느냐” “예(禮)는 잘 배웠느냐”는 질문.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두 가지를 꼭 배워 익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제대로 못 했습니다…”며 말끝을 흐리는 공리에게는 그 시간이 힘겨웠을 법하다. 부모가 집에서 자식을 깨우친다는 뜻의 ‘정훈(庭訓)’이라는 말은 예서 비롯했다.먼저 쌓은
상하이는 낭만과 꿈의 도시다. 170년 전에 대문을 열어젖힌 대륙의 항구로부터, 제국 열강이 중국을 경략하기 위해 발을 들였던 국제적 도시로, 나중에는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뒤 개혁과 개방의 선두 주자를 자임하며 중국의 경제적 활력을 대변했던 곳이다.그렇게 이곳에 닥친 역사의 화려한 풍상과 함께 뜨고 진 별들이 무수히 많다. 중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쉰(魯迅)의 무대도 상하이였다. 그는 고향이 저장(浙江)의 사오싱(紹興)이지만 상하이를 배경으로 글을 쓰고 발표하면서 문단의 거두로 성장했다
근신(謹愼)이라는 이 말, 그저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내리는 벌(罰) 정도의 의미로만 남았다. 사전 등에는 우선의 새김이 ‘조심’이라고 나오지만 이 낱말을 받아들이고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잘못을 저질러 받는 벌의 일종’ 정도의 뜻으로 새기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낱말을 이루는 앞 글자 謹(근)은 말을 조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말’을 가리키는 言(언)이라는 부수가 들어있고, ‘재앙’ ‘화근’ 등을 지칭하는 堇(근)이 있다. 따라서 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사안을 앞에 두고 입조심을 하는 경우라는 뜻풀이가 일
역시 다른 두 지역 이름을 합쳐 만든 지명이다. 설명에 따르면 1914년 도마동(道馬洞)과 화동(禾洞)의 두 지역을 통합하면서 앞의 한 글자씩을 따서 도화(道禾)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원래 대한제국 시기 인천부의 다소면에 속했던 곳으로 순우리말의 지명은 ‘도마다리’와 ‘베말’이었던 모양이다. ‘도마다리’는 말이 지나다니는 다리, ‘베말’은 벼 마을이라는 우리말로서 각각 도마동과 화동으로 자리를 잡았다가 나중에 도화동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졌다는 설명이다.道(도)는 우선 ‘길’의 새김이다. 그 길이라는 게 참 의미가 깊다. 우리가 가야
[뉴스웍스=유광종기자] > 정적을 느끼게 하는 1사단 사령부 정면 모습이다. 평양 인근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한국군 1사단은 마침내 평양을 선두로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임시로 차려진 1사단 사령부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그런 점을 예시하는 듯했다. 전쟁은 늘 조금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다. > 평양 점령 뒤 곧바로 벌어진 추가 작전이 평양 북부의 순천과 숙천의 공습 강하였다. 미 공정대를 투입해 이곳을 점령케 한 뒤 북으로 쫓기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내용이었다. 수많은
그런 그가 1593년 무렵 처음 서양의 선교사와 접촉한다. 서양의 선교사는 카타네오(L.Cattaneo)라는 인물이었다. 서광계는 그로부터 처음 세계지도를 봤다고 한다. 중국 외에도 드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포르투칼 출신의 스페인 항해사 마젤란이라는 인물이 지구를 돌아 항해함으로써 지구가 둥글다는 점을 증명했다는 사실도 들었다.그로부터 다시 7년 정도가 흘렀다. 이번에도 그는 서양의 한 인물을 직접 찾아간다. 바로 마테오리치(1552~1610년)였다. 마테오리치는 일찌감치 중국에 들어와 선교에 몰두하고 있었다. 중국어를
지금의 인천 남동구 만월산으로 추정하는데, 이곳 일대에는 붉은색의 흙이 돋보이는 산이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기러기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주안(朱雁)이란다. 붉은색 朱(주)에 기러기 雁(안)이다. 인천 일대의 옛 지도를 보면 朱岸(주안)이라는 이름도 나온다.붉은 색깔을 띠는 언덕(岸)이라는 뜻이다. ‘언덕’이라는 새김이기는 하지만 바다에서 볼 때 산의 모습이 그리 비쳤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인천 일대에서 ‘붉은색’이라는 새김의 朱(주)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는 이름은 이 말고 없는 편인데, 이 주안의 한자 이름이
아주 무덥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올해 여름 더위가 특별하다. 그러니 혹서(酷暑)라는 말이 자연스레 따른다. 지독한 더위를 보이는 여름이라는 뜻이다. 두 글자 연원을 좇아보면 제법 흥미가 인다.앞의 酷(혹)은 과거의 제례(祭禮)와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술을 가리키는 酉(유) 부수에 제사 지낼 때의 동작을 지칭하는 告(고)가 합쳐졌다. 따라서 ‘제사에 올리는 술’이라는 의미를 얻었다는 설명이 있다. 제사에 올리는 술은 순도(純度)가 높다. 알코올 함량도 따라서 높았을 것이다.그로써 번진 새김이 ‘높다’ ‘독하다’ ‘대
> [뉴스웍스=유광종기자] 평양을 탈환하면서 통일로 향하는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당시의 여러 정황을 사진으로 살펴본다. 평양 시내는 이내 국군의 점령 밑 세상으로 변했다. 우선 마지막 저항을 펼치던 북한군이 포로로 붙잡혔다. 국군 병사가 포로로 잡힌 북한군을 앉혀 둔 채 감시하는 장면이다. > 전쟁의 양상을 알리는 벽보와 포스터를 걸어 놓자 평양 시민들이 이를 열심히 살피는 모습이다. 곧 도착할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 탈환 기념식을 위한 조치였다. > 국군과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평양 복판에
이 상하이를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전국시대 춘신군을 논하자니 조금 개운치 않다. 춘신군의 태생지가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초나라 귀족으로 이곳을 봉읍으로 받았다는 점 외에 그가 오늘날의 상하이를 설명할 때 자신의 요소를 보탤 게 거의 없다. 그렇다면 유비의 군대를 무찔러 일약 중국 전쟁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스타 장군’으로 발돋움한 육손은 어떨까.마테오리치(왼쪽)와 서광계의 역사적 조우를 그린 그림. 서광계는 마테오리치로부터 천문과 수학 등 핵심적인 서구 문명의 요소를 익혀 중국에 전파한 인물이다.그 역시 대표라고 하
일제 때 행정구역을 통합하면서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이곳 일대에 있던 간촌(間村)과 석암(石巖)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 간석(間石)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우리는 이 역명에 정색을 하고서 그 풀이에 골몰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그 이름만으로 볼 때 간석은 ‘사이에 놓는 돌’의 의미다. 옛 건축 등에서 돌과 돌 사이에 두는 조그만 돌 정도로 보면 좋다. 그나저나 이 間(간)이라는 글자는 쓰임새가 하염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다. 우선 시간(時間)이다. 우리가 늘 맞이하면서 또한 늘 떠나보내야 하는 이 시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
대한민국 총리 자리에 누가 오를지는 늘 관심거리다. 강력한 권력의 대통령 바로 밑에 있는 사람이어서, 흔히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라고 하지만 실제 권한이 크질 않아 그저 ‘얼굴 마담’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정국의 주요 풍향을 가늠할 수 있는 인선인 셈이어서 사람들은 이에 주목한다. 총리는 내각의 제반 업무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비록 형식적이기는 할지라도 오래 비워둘 수만은 없다. 그러나 국회 청문회를 거치다가 중도에 낙마하는 경우가 많아 늘 누가 그런 바람 찬 총리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뉴스웍스=유광종기자] > 평양을 점령한 뒤 국군들이 지나는 부락에서 현지 주민들로부터 환영인사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역시 1950년 10월 19일 무렵의 사진이다. 전쟁은 잘 펼쳐질 때 의외의 변수를 경계해야 하는 법이다. 성난 파도, 거센 바람처럼 북진했던 아군의 기세는 좋았으나 역시 숨어 있는 변수에 둔감한 실수를 낳았다. 그 변수는 분명 북쪽의 바람에 실려 남쪽으로 내려 올 참이었다.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은 아군의 평양 점령으로 부쩍 높아졌다. 그럼에도 유엔군 수뇌부는 그 점에 매우 둔감했다. 국군 또한 평양 탈환으로 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