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가장 높은 정치와 행정의 토대에서 이끄는 사람의 직함은 대통령, 현재 그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은 박근혜다. 청와대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가 다 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는 짐작 수준이기는 하지만 대강은 안다.이제 청와대에는 무엇이 필요할까를 생각해 보는 시점이다. 가장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어느 대통령이든, 어떤 권력자이든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이다. 실수가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 신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실수가 빚어지기까지의 과정은 늘 돌아보며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일이 중요하다. 결국은
남성의 성을 없애는 일, 즉 거세(去勢)를 거쳐 관직에 오른 사람이 내시(內侍)다. 과거 동양 왕조 시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존재다. 본래는 거세와 관련이 없었다. 임금의 주변, 권력 최고 상층부의 안쪽 잡무 등을 관리하는 일종의 관직 이름이었다.조선에 들어서면서 내시의 의미는 매우 확실해졌다. 거세한 남성으로서 왕궁의 내부 일인 청소, 문서 수발, 음식을 비롯한 생활 속의 잡무를 관리하는 신분이었다. 보통은 宦(환)이라는 글자가 따른다. 이 宦(환)은 집을 가리키는 宀(면)이라는 부수에 원래 노예 등을 지칭하는 臣(
물론 실제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런 멋진 사내들이 모여 로망을 펼쳤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다. 108명의 두령이 양산박(梁山泊)이라는 곳에 모여 의적(義賊)으로서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큰 줄거리다. 그 배경이 바로 산둥이다. 이점 때문에 ‘산둥→수호전의 양산박→좋은 사내’라는 이미지가 박혔는지 모르겠다.그런 산둥의 기질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공융(孔融)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지는 몰라도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그렇게 방벽을 쌓아 사람들이 몰려 큰 규모를 이루는 곳에는 성시城市라는 말을 쓴다. 우리말 쓰임새에서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으나, 중국에서 일반적인 도시를 가리킬 때는 이 단어를 아주 많이 쓴다. 성읍城邑이라는 단어도 그와 같다. 방벽을 두른 곳으로서, 이 또한 인구가 많이 몰려 사는 곳이다.지금 우리가 자주 쓰는 국가國家라는 단어의 國(국)이라는 한자도 사실 원래의 출발점은 ‘성을 두른 곳’이라는 의미였다. 제법 큰 규모의 성곽을 둘러 정치적 권력의 핵심을 이루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는 나중에 다시 왕조 체제의 나라, 지금의 민족
> 앞에 적이 도사리고 있는 정황이 있다면 군대는 나아가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1951년 3월 중순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을 탈환하러 나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공군은 한강 남안에서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직 서울 어딘가에 모습을 감춘 채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공군은 얼음이 풀려 땅이 녹는 해토기(解土期)에 앞서 서울에서 물러날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따라서 서울 전역에는 중공군이 거의 없던 무렵이었다. 그럼에도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최대한 신중을 기하는 게 군대의 일이다. 한국
한국인으로서 중국에 사업이나 여러 일로 다녀본 사람들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중국인들이 “우리는 친구(朋友)” “우리는 형제(兄弟)”라고 하는 경우다. 낯선 외국인과 만나 정감의 깊이를 더 하려는 중국식의 노력이다.“우리는 친구”라는 말은 좋다. 친구는 아래 위의 관념이 들어 있는 말이 아니라서 그렇다. 다음 말인 “우리는 형제”라고 할 때 가끔은 문제가 발생한다. ‘형제’ 역시 ‘친구’에 못지않은 말이다. 오히려 피를 나눈 혈족(血族)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어서 친구에 비해 더 가까운 사이를 지칭하는 말일 수 있다.그러나 이 단어
1980년 2호선 개통 당시의 역명은 성내城內였다가 2010년 지금의 잠실나루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나루라는 순우리말은 한자로 津(진)이다. 육로의 여행길도 험하지만, 그보다 사람의 통행을 결정적으로 가로막는 곳이 하천이다. 그런 물길이 좁아지는 곳에 사람과 물자 등이 건너가는 나루가 들어섰을 것이다.그런 나루와 津(진)에 관해서는 1호선을 여행하면서 거쳤던 노량진(鷺梁津)에서 이미 설명했다. 참고로 노량鷺梁이나 노량露粱, 명량鳴粱 등 우리 지명에 粱(량)이라는 글자가 붙은 곳이 제법 많다. 이 역시 나루가 들어서는 곳에 가깝다.
거울 이야기는 한자 세계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런 이야기 중에 나오는 특별한 거울 하나가 있으니 바로 진경(秦鏡)이다. 중국 판도를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秦始皇)이 그 물주(物主)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법(魔法)의 거울이다.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꾸로 비춰진다.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으면 오장육부(五臟六腑)가 훤히 드러난다. 다시 손을 가슴에 대면 사람의 마음마저 나타난다. 몸에 지닌 질병, 마음이 지닌 착함과 삿됨의 선악(善惡)을 비췄다고 하니 이 거울은 최고의 보물임에 틀림이 없다.거울의 소유자인 진시황이 중국 최초 통
> 경기도 여주에서 서울 탈환을 위한 마지막 회의를 위해 모였던 유엔군 야전 지휘관들이 회의를 마친 뒤 촬영한 사진. 1951년 2월 무렵이다. 오른쪽 첫째가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 둘째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셋째가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다섯째가 백선엽 한국군 1사단장이다. 이 여주 회의에서 리지웨이 사령관은 적을 향한 강력한 공격을 주문했다. 아군은 그에 따라 안성의 북위 37도선에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는 중이었다. 중공군은 2~3차 공세를 벌이다가 발생한 심각한 병력 및 물자 손실로 반격다운 반격을 펼치지 못
중국에서 생활하는 외국 사람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경계해야 할까. 더구나 신분이 제법 높은 사람이거나, 공직에 올라 제 자신의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 그래야 할까. 정답은 달리 없다. 그러나 적어도 공적인 일로 중국에 파견을 간 사람이라면 낯설지만 예쁘고, ‘우연’스럽게 자신의 옆에 와있는 중국 여성에게는 한 번 경계감을 품을 필요는 있을지 모른다.잘 나가는 외국의 외교관이나 공적인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중국에 주재하다가 우연히 자신의 곁에 선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가 본국으로 불려들어가 옷을 벗는 경우가 제법
이 말이 궁형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사람들의 입에 본격 오르는 데 기여한 사람은 바로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사마천司馬遷이다. 그는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중국의 역사 토대를 세운 사람에 해당한다. 그는 저서 를 통해서 중국 역사의 계보系譜를 세웠다. 황제黃帝로부터 자신이 섬겼던 황제 한나라 무제武帝까지 이어지는 족보를 만들어 중국역사의 계통을 확립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황제인 무제에게 괘씸죄를 얻어 생식기가 잘리는 궁형을 당한다. 그가 스스로 남긴 한 문장에서 “나는 (강제로) 잠실에 들어가
춘추시대의 개념으로 따지자면 산둥이 ‘제로(齊魯) 문화’의 권역에 있다는 점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다. 이 문화가 중국의 역사마당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아주 특별하다. 관중(管仲)을 부하로 거느리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을 실현해 춘추시대의 가장 큰 패업을 달성한 제나라 환공(桓公)은 지금까지 강대한 국가의 건설을 꿈꾸는 중국 정치인들의 표상이기도 하다.그런 제나라의 전통과는 달리 노나라는 몰락한 천자(天子)의 주(周)나라 전통을 이어받아 사상적 기반을 닦은 나라다. 춘추라는 시공 속 구심점을 이뤘던 주나라의 예악(禮樂)이라는 전통
>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지금은 없어진 옛 광화문 중앙청사 앞에서 선전용 사진을 찍는 모습이다. 중공군은 3차 공세 끝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마음속 한 구석에는 불안감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 전쟁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앞서 중공군은 3차 공세의 과정에서 함경도 장진호 일대를 공격하다가 미 1해병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수많은 피해에 직면했다. 3개 군단 이상의 군대가 더 이상 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명의 희생이 컸고, 동상에 걸린 수 만 명의 병
조선시대 누에를 쳐서 비단실을 뽑는 양잠養蠶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누에가 토해내는 명주明紬실이 비단, 곧 실크의 원재료다. 옷감을 뽑을 수 있는 여건이 지금과 같지 않았던 과거 왕조 시절에는 비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양잠사업이 곧 국가적 과제의 하나이기도 했다.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농사農事와 함께 이 양잠은 자연스레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농잠農蠶이라든가, 농상農桑 등의 단어가 만들어졌다. 농사 일반을 일컫는 農(농)이라는 글자와 양잠을 가리키는 蠶(잠), 桑(상)을 함께 병렬한 엮음이다. 桑(상)은 뽕나무가 우선 새김이
이처럼 호칭에 ‘자(子)’를 붙이는 경우에 주목하자. 이런 호칭은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는 것은 아주 최소한의 ‘기본’이다. 그 일가를 이룬 데 이어 사방팔방으로 그 영향력을 뻗쳐야 함은 물론이고, 시대를 초월해서 영원토록 다른 사람들이 그 업적을 인정해야 붙는 호칭이다.공자는 중국을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사상체계, 즉 유교 철학의 창시자다. 맹자 또한 그 법맥(法脈)을 이어받아 유학의 사상을 키웠다. 증자는 그 중간에서 유학적 사고를 제대로 자리 잡도록 이끈 인물이다. 손자는 또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