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해지면서 어지간한 약물 등에 항력(抗力)까지 지녀 고칠 수 없는 증세로 자리를 잡은 병이 고질(痼疾)이다. 처음에는 쉽게 보았다가 차츰 깊어지는가 싶더니 사람의 힘으로는 손을 댈 수 없을 정도까지 확산한 병이다. 우선 떠오르는 성어가 ‘병입고황(病入膏肓)’이다.춘추시대 진(晋)나라 경공(景公)의 이야기다. 그가 어느 날 중병에 들어 용하다는 진(秦) 나라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진맥하기 위해 부리나케 이동하고 있을 무렵 경공은 꿈을 꿨다. 그 꿈에 두 아이가 등장해 나누는 대화내용은 대강 이랬다.“이 번에 오는 의사
사실, 이 축선의 구조와 그를 현세의 생활에 제대로 구현해 활용하는 중국의 전통적 사유형태는 더 차분하고 깊게 들여다 볼 주제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이 축선의 개념을 지닌 장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이 글에서 그 면모를 충분히 들여다 볼 여유는 없다. 그저 베이징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긴 도시의 축선을 지닌 곳이고, 전통의 주택마저 그 축선의 개념을 매우 발전시켰다는 점을 우선 말해두기로 하자.단지 하나 부연할 게 있다. 축선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경계다. 정통과 비(非)정통을 구분하는 경계선이기도
조선에서는 원래 이 일대가 다 경기도 광주군廣州郡에 속했던 지역이다. 닥점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성종成宗이 묻혔던 선릉宣陵의 원찰이었던 봉은사(奉恩寺), 한강 쪽으로 난 무동도舞童島의 이름을 지닌 마을 세 개가 있었다. 이 세 마을을 합쳐 삼성리三成里라는 명칭을 만들면서 생겨난 이름이 오늘의 삼성三成이라는 설명이다.닥점은 종이를 만드는 데 꼭 필요했던 닥나무를 많이 재배해서 얻은 이름이다. 저자도리楮子島里라는 한자 이름이 그에 따랐다고 한다. 봉은사에 관해서는 달리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가 거쳐 왔던 앞의 역 ‘선릉’에서
베이징의 대표적 전통 주택은 사합원(四合院)이다. 동서남북의 네 벽(四) 또는 건축물들이 주택 가운데의 뜰(院)을 향해 모여 있는(合) 꼴이라는 뜻이다. 어렵게 이해할 필요 없이, 이는 우리 한옥의 ‘ㅁ’꼴 형태의 주택을 떠올리면 좋다. 가운데 만들어진 뜰을 향해 사방의 벽면이 모여 있는 ‘ㅁ’꼴이어서 이 집은 안에 들어서면 우선 조용하고 은밀하다는 느낌에 빠져든다.벽 외면에는 원래 창 하나도 내지 않았던 주택이다. 따라서 사방의 벽은 마치 성채의 성벽과 같은 느낌을 준다. 모든 벽과 건물 구조가 가운데에 있는 뜰을 향해 있으니 밖
선릉역의 다음 글자가 陵(릉)이다. 이는 왕릉王陵, 즉 조선과 고려, 나아가 신라시대 모든 왕과 왕후 등을 안장한 묘다. 그 정도의 뜻으로 매우 잘 알려진 한자다. 원래의 새김은 흙이 커다랗게 쌓여 있는 곳을 가리킨다. 큰 산과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법 웅장하게 쌓인 흙이나, 원래 그렇게 높이 쌓인 흙무더기 정도의 뜻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구릉丘陵이다. 큰 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제법 산의 모양을 닮은 언덕 정도의 지형이다. 그렇게 생긴 지형에 대개 이 글자가 붙는다. 나중에 높게 쌓은 군왕의 무덤을 부를 때 자연스레 이 글
> [뉴스웍스=유광종기자] 전선이 흔들려 아군의 후퇴, 나아가 전반적으로 전쟁의 형세가 불리한 쪽으로 기울 경우 피난민의 대열은 여지없이 늘어선다. 1950년 말 그런 상황에 아군이 놓였을 때 평양을 앞 다퉈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평양 인근의 기차역이다. 날씨는 매우 추웠다. 살림살이를 하나라도 더 챙겨 떠나는 평양 인근 피난민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그 해 10월 말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북진에 나섰던 아군 대열이 크게 무너지면서 상황은 다급해졌다. 어디까지 밀릴지는 그 누구도 내다보기 어려웠다. > 적에게 쫓기는 상황은
조선이라는 왕조의 제도적 기틀을 다진 이가 성종成宗 1457~1494년이다. 조선 제 9대의 국왕이다. 재위 기간은 죽기 전까지 24년이다. 임금이 죽은 뒤에 왕실 가족과 대신들이 서로 그의 업적을 평가해 짓는 묘호廟號가 ‘성종成宗’이라는 점에 우선 주목하자. ‘이루다’ ‘성취하다’ 등의 새김인 成(성)을 붙인 점이 그렇다.제도적으로 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틀을 구축한 임금에게 붙이는 묘호가 바로 이 성종成宗이다. 그는 주지하다시피 을 완성해 조선의 통치기반을 다졌다. 법제法制의 완비였다고 해도 좋은 업적이다. 아울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는 국민 대부분이 즐겨 암송했던 시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머릿속으로 한 번씩은 떠올려보는 글이다. 말이 아름답고 의미 또한 깊으며 그윽하다. 국화(菊花)라는 가을꽃에 드리우는 사람들의 뜻이 남다르기 때문이다.“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꽃이 좋고 열매도 많이 맺는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않아, 내를 이뤄 바다에 이른다. 웬만한 한국인은 이 글 다 안다. 한글 창제에 이어 만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한 대목이다.아름답기 그지없는 우리말이다. 원문에서 ‘열매’는 ‘여름’으로 나온다. 이 여름과 우리가 지금 맞고 있는 계절 여름은 상관이 있을까.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원(語源)을 따지는 글은 여름이라는 낱말이 해(日), 나아가 농사를 통해 열매를 가꾸는 일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따라서 여름은 일조
고려에서는 이 역참을 관리하는 우두머리로 역승驛丞을 뒀다. 22개 역도를 담당하는 역승을 두고 그 아래 각 역을 관장하는 역장驛長을 감독하면서 이끌도록 했다. 조선 중엽에 들어와서는 이 명칭이 찰방察訪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문관文官으로서 종6품에 해당하는 외관직外官職이었으며, 역시 고려 시대의 역승처럼 각 역의 역장을 감독하는 직위였다. 마관馬官 또는 우관郵官이라고도 했다.따라서 같은 역참이라고 할지라도 찰방이 머무르는 곳은 규모나 인원 등에서 다른 일반 역참보다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참의 찰방이나, 그 밑에서 각 역을
베이징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금성 한 바퀴 휙 둘러보고 “옛날 황제들이 제법 그럴 듯하게 살았군!”이라며 단순한 감탄만을 할 대목이 아니다. 통치의 근간을 초장(超長)의 축선으로 세우고 정통의 근간을 만들어 명분을 제대로 일으킴으로써 드넓은 대륙을 이끌려고 했던 축선의 설계, 또는 그 안에 담긴 방략(方略)의 무게를 느끼는 게 필요하다.축선은 결코 옛날의 일만은 아니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세상을 뜬 뒤 그 시신을 축선의 ‘포장재’로 활용하고 있다. 천안문 광장 남쪽에 있는 마오쩌둥 기념관이 바
중화민족의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을까. 적어도 중국의 많은 이들은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을 중화민족의 커다란 경사로 보는 수준을 넘어, 중국이 제대로 일어섰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민족의 쾌거로 간주했다. 당시의 올림픽에서 중국인들은 제대로 알아차렸지만, TV를 통해 이를 지켜보던 세계인들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점이 있다.앞에서 소개했듯이, 베이징의 옛 도시 축선은 약 7.3㎞로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을 지나, 북쪽의 종루와 고루로 이어지는 데 불과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 축선을 연장했다. 종루와 고루의 북쪽으로 다시 12㎞를
조선시대 역참驛站 제도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조선이 운영했던 많은 역참의 하나, 즉 지금 지하철 3호선 역의 하나인 양재역良才驛에 붙어 있는 마을이라서 얻은 이름이다. 조선 양재의 역참 옆에서 그 기능을 보완하던 세 마을은 말죽거리와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다. 말죽거리는 지금도 그 명칭이 살아 있다. 웃방아다리는 한자 이름으로 상방하교上方下橋, 아랫방아다리는 하방하교下方下橋로도 적거나 불렸다. 역참에 붙어 있는 마을 셋을 엮어 역삼리驛三里라고 불렀던 데서 나온 이름이 지금의 ‘역삼’이라는 설명이다.역참驛站은 과거 동양사회에서
스산하면서 어딘가 숨을 꽉 막히게 하는 모습을 일컬을 때 살풍경(殺風景)이라는 단어를 쓴다. 좋은 경치 죽인다는 엮음이다. 사전적인 뜻에 따르면, 좋고 훌륭한 경치를 망가뜨리는 어떤 모습이다. 이런 살풍경이 빚어지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다 많다. 소설가 심훈은 작품 ‘영원의 미소’에서 “여러 해를 두고 갉아 먹은 산과 언덕이 살풍경을 면하기는 앞으로…”라고 썼다. 메마르고 볼품없는 풍경을 말한 것이다. 좀 더 나아가면 “광기가 어린 살풍경은 귀신이라도 잡을 듯했다”(이기영ㆍ고향)는 표현도 나온다. 살기까지 느껴지는 분
자금성 안의 건축들은 모두 옛날 황제만이 거닐 수 있는 황도(皇道) 위에 얹혀 있으며, 그 종루와 고루의 한참 북쪽으로 올라가면 베이징 북녘을 병풍처럼 가로지르는 옌산(燕山) 산맥이 있다. 중국의 옛 도성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을 중심으로 짓는다. 풍수의 관점에서는 북쪽의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지기(地氣)를 설정하는데, 이 맥이 이른바 ‘용맥(龍脈)’이다.이를 테면, 베이징의 풍수 상 주산(主山)은 옌산 산맥이며 저 멀리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꿈틀대며 남하하는 용맥은 이 옌산의 산맥에서 큰 또아리를 틀었다가 곧장 남하해 베이징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