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영의 덕후철학] A급 시민의 F급 정치
[이호영의 덕후철학] A급 시민의 F급 정치
  • 이호영 철학박사(런던대)
  • 승인 2016.12.0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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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시민에 F급 정치. 입에 담기 힘든 짓을 저지르고 거짓말만 하는 수준 이하 정치가들과 자발적이고 질서 있는 시민의 촛불집회,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이렇게 극단적이다. 황당해 보이지만 오늘날의 F급은 다름 아닌 A급 시민이 18년간 지켜본 후 확신을 가지고 투표로 뽑은 사람이다. 어떻게 A급 시민은 F급 정치가를 뽑을 수 있었을까? A급 시민이 진정한 A급이 아닌 까닭이다.

미국 영화에는 A, B, C급이 있다. 장르가 아닌 수준이야기다. 발리우드나 메이드인 차이나, K무비도 있지만 허리우드만 놓고 보자. A급 영화란 인력, 자금, 스토리 모든 것을 완비한 영화다. 우리가 잘 아는, 잘 만들어진(well-made) 대부분의 허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이것이다. 너무나 당연히 A를 투입해 A가 나온 경우다.

하지만 A를 투자한다고 A만 나오는 건 아니다. 돈을 돈대로 들여도 중간에 뭔가 하자가 생기면 A가 아닌 C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소위 졸작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영화는 배우와 연기 그리고 배경이 따로 놀고, 스토리의 앞뒤는 삐꺼덕거리고 편집은 뭔가 구리다. 이 모든 야로가 모이면 졸작으로 변한다. 아주 가끔 D나 F급이 나오는 재앙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바로 그렇다.

허리우드에서는 F급 재앙은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검증 시스템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이 탄탄한 B급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B급이란 저예산 영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감독은 재능 있고, 스토리는 탁월하고, 아이디어는 반짝거리지만 제작비는 없을 때 만드는 영화가 B무비다. 물량보다는 몸과 아이디어로 때운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저예산 B무비에는 졸작만큼 명화 또한 많다. 소위 저주받은 명작들이나 숭배의 대상인 컬트(cult)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분야다.

B급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르가 바로 컬트와 예술, 그리고 공포영화 분야일 것이다. 특히 저예산 공포영화는 기발함과 엉뚱한 아이디어로 승부를 거는 각축장이다. 자금이 부족하니 대부분 몸으로 때우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로 남들이 생각지도 못할 깜짝 놀랄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공포란 원초적인 감성인데다 상황이 중요하다보니 아이디어만 잘 운용하면 투자 대비 수익이 가장 크다. 게다가 가장 빛나는 재능,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급하는 근원이기도 하다. 창조경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고, 대박이 곧 여기서 터진다.

B무비는 그냥 ‘B자’로 끝나지 않는다. 잘 만든 B무비는 낭중지추(囊中之錐)고 모난 돌이다보니 애초에 정을 맞아 소멸하거나 아니면 크게 유명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거물이 된 감독이 바로 <아바타>와 <타이타닉>을 만든 제임스 카메룬이고 <반지의 제왕>을 제작한 피터 잭슨이다. 미남배우 조지 크루니는 아마 가장 유명한 B급 출신 배우일 것이다. 이들이 B무비에서 보여준 엉뚱한 아이디어, 천재성은 이후 A급 영화의 자양분으로 작용한다. A급 영화가 상업적이라도 작가정신과 독창성을 유지했기에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열린 B가 받쳐주고 있기에 완성된 A가 힘과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의 A급 시민이 만든 모든 대통령은 불행히도 C나 D로 막을 내렸다. 심지어 오늘날은 F까지 직면했다. 하지만 보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공무원은 모두 시민으로는 A급이지만 자리에 앉으면 C나 D로 타락한다. 제도나 시스템을 탓할 것도 아니다. 모두 선진적인 걸 잘 베껴왔다. 그렇다고 권력 때문도 아니다. 의아해 할 것 없다. 한국문화의 결함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교육도 사회도 1등이 아니면 인정해 주지 않는다. 오직 정해진 길만 있다. 열린 생각, 반짝이는 아이디어, 새로운 담론을 인정받지 못한다. 새로운 상상도 소용없고 딴 짓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낭중지추건 튀어나온 돌이건 무조건 왕따다. 그저 오직 하나로 향하는 질서뿐이다. 이 점 틀림없이 A급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ABC의 순서에서 한국엔 B가 빠졌다. A에게 영감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B가 빠지니 A는 생명력을 잃고 타락한다. 받혀줄 B가 없으니 비록 A로 시작하더라도 졸작 C나 지저분한 D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한국 문화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창의성과 유연성을 의미하는 B를 키우지 않는 한 아무리 A급 시민정신으로 A급 제작비를 투입해 대통령을 뽑건, 헌법을 새로 만들건 우리 정치는 또다시 타락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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