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2.12 10:46

요즘 이 말 함부로 쓴다. 촛불 집회의 성난 민심 현장에서 정치적 구호로 마구 외쳐대는 말이었으면 그러려니 한다. 국회의원으로서 의정(議政)을 담당하는 현역 정치인, 더구나 법을 전공해 법조인으로서도 활동했던 사람의 입에서 이 말이 터져 나오면 주목할 일이다.

부역(附逆)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풀이는 ‘반역 집단을 돕는 행위, 또는 그런 사람’이다. 왕조시대 왕권이나 정통의 자리에 선 사람에 대항하는 행위 등을 지칭했다. 왕조시대의 쓰임에서 이 말은 혹독한 정의(定義)에 해당했다. 왕조에 저항하는 집단이나 사람은 곧 극형으로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 흐름에서 이 말은 얼마 전에 등장했다. 바로 6.25전쟁 때다. 전쟁 중에 적군에 점령당한 지역에서 저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에게 사용하면서다. 이들에게는 ‘부역’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부득이하게 협력한 사람들에게까지 이 꼬리표가 따라다니면서 각종 인권 침해의 시비를 낳았다.

적극 적군에게 가담한 사람은 극단적인 린치를 피하지 못했다. 적군이 점령했던 곳을 회복한 뒤에 적극적으로 적군에 부역한 사람들은 가혹한 테러, 나아가 현장에서 ‘즉결처분’이라는 형식 등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말은 그대로 역적(逆)에게 붙었다(附)는 엮음이다. ‘역적(逆賊)’은 멀리로는 왕조시대의 반역 집단, 가깝게는 우리를 침략한 적군(敵軍)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역적은 왕조시대의 짙은 어둠에서는 어울릴지 모른다. 그 음울함을 다시 인용한 전쟁의 상황도 그나마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이 부역이라는 단어를 지금 사용하는 일은 온당할까. 여야로 나뉘어 나름대로 민주주의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 단어의 쓰임은 정당성을 지닐까. 물론 아니다. 결코 함부로 쓸 수 있는 단어는 분명 아니다.

최근 언론의 보도를 주목한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12일 라디오 인터뷰다. 그는 법조 출신으로서 인천 시장을 역임키도 했던 현역 국회의원이다. 그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황교안은 부역세력의 핵심이고 사실상 내각을 총사퇴시켜야 하지만 국정공백 때문에 임시로 두고 있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절차 시작과 함께 그 대행체제를 구축한 현 황교안 국무총리를 ‘부역세력의 핵심’이라고 간주했다. ‘부역’의 말뜻을 도대체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말인즉슨 황교안이 반역자 또는 우리를 위협하는 적군에게 붙은 사람의 실세라는 뜻인데, 국정공백의 우려 때문에 임시로 그가 이끄는 대행체제를 그대로 두고 있다는 맥락이다.

적이라면 국정 공백이고 뭐고 간에 일을 맡길 수 없다. 당장 우리의 안위를 해치려는 적 또는 그에 부합하는 세력이라면 처단, 응징의 칼을 겨눠야 옳다. 그게 단어에 담긴 뜻으로부터 번지는 정확한 논리다. 송영길 의원의 머릿속에 담긴 ‘부역’이라는 말의 정의는 과연 뭘까.

말뜻도 이해하지 못한 채 쓴 경우일 수 있다. 말이 담은 선정성에 기대려는 노림수였을 수도 있다. 그 말을 씀으로써 제가 높아진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인으로서 지녀야 할 양식과 품격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치는 조정과 타협의 긴 과정이다.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을 끊임없이 번지도록 하는 일과는 정반대다. 촛불의 민심에 이어 정치권이 지향해야 하는 일은 박근혜 탄핵 정국 이후의 차분한 수습이다. 이런 마당에 ‘부역’을 함부로 들이대는 우리 정치인의 수준을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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