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2.20 15:56

(3) 동부전선에서-4

> 6.25전쟁 중 벌어진 각종 전투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꼽히는 싸움이 있다. ‘아군의 패배’를 거론할 때다. 전체 전쟁 중에서 아군은 꽤 많은 패배를 기록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피와 땀을 흘린 점은 맞다. 그럼에도 패배를 제대로 적어야 옳다. 이런저런 이유로 패배를 제대로 적지 않을 경우 그런 재앙은 또 닥치기 때문이다. 그런 패배를 거론할 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싸움이 바로 ‘현리 전투’다. 1951년 5월 16일 불붙은 강원도 인제군 현리에서의 싸움이다. 그 전투의 개요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중공군은 중서부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동부로 공세를 전환했다. 인제 일대의 한국군 방어지역이었다. 중공군 전체 54만 명이 나선 이 때의 싸움을 ‘중공군 제6차 공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 아군은 미 10군단 우측의 한국군 5, 7사단이 섰고 그 동쪽으로 다시 한국군 3군단이 늘어섰다. 중공군은 이곳으로 2개 군단에 북한군 1개 군단을 증편해 공세를 벌였다. 5월 16일 오후 4시경 강력한 포격을 벌이며 시작한 중공군 공세는 한국군 7사단을 무너뜨린 뒤 동쪽의 3군단을 직접 겨냥했다. 이곳으로 중공군 제20군단 예하의 제60사단 제178연대 제2대대 첨병 중대가 17일 오전 4시에 쇄도했다. 점령 목표지는 한국군 3군단 후방의 ‘오마치 고개’. ‘오마치’는 말 다섯 마리가 겨우 지나가는 고개라는 뜻의 五馬峙로 적는 곳이다. 그곳으로 국군 방어지역의 종심을 뚫고 선착한 중공군 중대가 도착하면서 전황이 급격히 악화했다. 후방의 퇴로가 끊긴 셈이었기 때문이다. 이어 중공군 대대가 오전 7시에 도착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진은 한국군이 적이 곧 닥칠지 모를 전선을 관측하는 장면이다.

 

> 퇴로를 확보한 뒤 작전에 임하는 것은 전선 지휘관에게는 철칙 중의 철칙이다. 유사시에 퇴로가 끊긴다면 닥치는 일은 몰살(沒殺)이거나 전원이 포로로 잡히는 일이다. 따라서 퇴로를 확보하지 못한 채 전투에 임하는 일은 금물 중의 금물이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군 3군단은 오마치라고 하는 조그만 고개, 유일한 전력 및 물자 보급로이자 유사시에는 절대적인 퇴로였던 곳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노련한 중공군은 이곳을 선점하기 위해 아군의 중심을 뚫고 새벽 내내 내달려 중대 병력이 선착했고, 이어 대대 병력이 닿았다. 아군은 깊은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상황을 정리할 능력을 보이지 못했다. 사진은 1951년 5월 소양강을 넘어 진격해 오는 중공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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