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2.21 09:57

슈베르트의 몇 곡을 종일 들었다. 그중에서도 '죽음과 소녀'를 몇 번이고 재생해 들었다. 30분이 훌쩍 넘는 곡에 빠져 있다 보면 조금 다른 세상에 있다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사실 '죽음과 소녀'는 내 마음이 지옥 같을 때 찾아 듣는 곡이다. 혹시 그럴 수 없는 형편이면 눈앞에 마리안 스톡스의 그림을 떠올린다. 인간이 물질적 존재 이상이라는 것을 이럴 때 실감한다. 인간은 기억을 할 수 있고 상상력이 있으며 그것을 이미지로 구현할 수 있다. 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곡을 듣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깊고 검은 밤이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소녀는 놀라 일어난다. 낯선 이의 얼굴은 지금까지 만날 수 없던 인간의 형상이다. 두려움으로 소녀는 몸을 움츠리고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당긴다. 자유로운 영혼의 여성화가 마리안 스톡스(Marianne Stokes)의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 1900)’는 단정하고 절도 있는 구도를 사용하면서도 인물의 방향성과 색상의 대조로, 낯선 죽음의 방문을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Marianne Stokes <Death and the Maiden, 1900>

마리안 스톡스(Marianne Stokes, 1855~1927)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뮌헨과 프랑스에서 수학했다. 그의 초기작은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은 전원 풍경이 대부분이었으나, 파리에서 남편 에이드리언 스톡스(Adrian Scott Stokes, 1854~1935)와 결혼하면서 다양한 자극을 받게 된다. 남편 에이드리언은 미술 비평가였으며 그 역시 풍경화가이기도 했다. 둘은 결혼 이후 영국에 거주하면서 많은 여행을 다녔고 다양한 화가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차차 마리안은 중세의 사랑 이야기나 성서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마리안 스톡스에게서 라파엘 전파의 분위기가 나는 것은 이때문인 것 같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자. 죽음의 대천사는 절도 있는 손짓으로 소녀의 두려움과 거부를 제지하고 있다. 커다란 검은 날개, 초록빛이 도는 검은빛의 얼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싼 길고 검은 벨벳 옷은 축축하고 무거운 느낌으로 이 세계의 공간과 다른 존재임을 알려준다. 축 늘어진 오른팔에 들린 램프는 그가 앞으로 가야 할 죽음의 길이 얼마나 어둡고 좁고 긴 길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등에서 펼쳐 올라온 검고 깊은 날개의 공간이 아늑함을 드리우기도 한다. 소녀는 죽음에게 간청하고 있다. 흰 잠옷은 소녀의 순결함을, 붉은 이불은 성스러움을 더하는 듯하다. 바닥으로 떨어진 분홍의 꽃잎들은 그녀에게 곧 닥칠 생명의 종말을 고하는 듯 흐트러져 있다.

타나토스(Thanatos)와 에로스(Eros)를 상징적으로 그려내는 '죽음과 소녀'의 주제는 일찍이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의 신 하데스가 사랑한 페르세포네의 이야기에서도 그 모티브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술가라면 자연스럽게 죽음과 삶을 파고들 수밖에 없는 법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죽음과 소녀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들은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왔다. 물론 세기말의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다시 슈베르트로. 작곡가 중에 그만큼 시를 사랑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가곡은 대부분 잘 알려진 시에 곡을 붙여 만든 것이다. 슈베르트는 스무 살 무렵에 마티아스 클라우디스의 시로 '죽음과 소녀'라는 가곡을 쓴다. 혈기왕성한 그는 자유롭고 싶었고 그 욕망에 따른 절제 없는 생활을 한다. 그 생활 가운데 얻은 매독은 그를 죽음으로 서서히 이끌어가게 된다. 가난과 질병 가운데 그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가온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27세에 이르러 그 가곡을 모티브 삼아 현악4중주 14번 D단조(String Quartet No. 14 in D minor) ‘죽음과 소녀’를 작곡한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빛나는 스무 살에 시에 곡을 담았던 마음과 죽음을 예감하며 곡을 작곡하는 마음은 얼마나 다른 것인가. 인간의 삶은 대개 잔인하고 연약하며 유한하다는 것이 실감 난다.

"요단을 건너는 저 가을빛(이성복)"처럼 죽음은 늘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 근처에 있다. 죽음은 늘 가치 있는 것을 탐낸다. 죽음은 늘 아름다움과 가깝다. 지나치게 아름답고 극적인 마리안 스톡스의 그림을 보며 죽음 같은 시간을 견딘다는 것이 그가 가진 아름다움의 대가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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