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2.21 16:09

때로는 설, 때로는 한 해에 찾아드는 절기를 가리키다 다시 때로는 한 해 중의 어느 때, 또는 그저 세월이라는 뜻으로 풀 수 있는 말이 세시(歲時)다. 따라서 함의가 여럿이다. 이 글을 적는 날이 한 해의 스물 넷 절기 중 스물둘째인 동지(冬至)여서 떠올리는 말이다.

시간의 갈마듦은 꾸준하다. 해가 떴다 지고, 달이 스쳐 지나가고, 그로써 한 해도 저문다. 늘 변함없는 시서(時序)의 흐름이지만 그 속을 나그네처럼 스쳐가는 사람에게는 빠르게만 느껴진다. 동지 지나면 양력의 한 해는 곧 저물고 만다.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의 시간은 저 먼 곳에서는 어느 무렵일까. 북송(北宋)의 문인 소동파가 그를 품어본 적이 있다. 술잔을 들고 달을 쳐다보며 묻는 사(詞)에서다. “하늘의 궁궐에서 오늘 저녁은 어느 시절인지 모르겠다(不知天上宮闕, 今夕是何年)”는 구절이다.

지구로부터 평균 38만㎞ 떨어진 달의 시간을 엿보고자 한 물음이다. 그런 달보다 훨씬 더 먼 태양의 시간은 어떨까. 하찮은 광년(光年)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이 그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은하계 주변, 은하계 밖의 까마득히 먼 우주의 천체(天體) 시간도 궁금하다.

지구의 바깥으로부터 던지는 시점(視點)에서 느껴지는 문학적인 상상이다. 그래서 특별하다는 느낌을 준다. “푸른 하늘의 저 달은 얼마나 오래 떠있었을까(靑天有月來幾時)”로 시작하는 이백(李白)의 시 또한 그런 매력을 던진다.

“저녁 무렵 바다에서 슬쩍 떠올랐다가, 새벽에 구름 사이로 몰래 사라지는” 달의 모습을 형용하다가 그는 이렇게 읊는다. “지금 사람은 옛 달을 본 적이 없지만, 지금 저 달은 옛 사람들을 비췄지(今人不見古時月, 今月曾經照古人).”

이어 던지는 시구에 맑은 밤하늘의 달을 보며 품은 감정이 짙게 묻어난다.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흐르는 물과 같았을지라도, 함께 쳐다 본 달은 늘 그 자리에 있을 뿐(古人今人若流水, 共看明月皆如此)”이라고 했다.

멀리서 바라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내가 디디고 선 이 지구라는 행성 말이다. 푸른 한 점이 보이다가 그 마저 사라지는 때도 그야말로 금세 닥친다. 태양계 먼 외곽에서 그렇고, 그를 벗어나면 그나마 보이지도 않는다.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우주라는 공간에서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워 ‘먼지’라고 하기에도 버겁다.

그러나 이 땅에서 벌어지는 온갖 애환(哀歡)과 희비(喜悲)의 갈래는 무수하다. 그 속에 푹 파묻히다 맞이하고 보내는 시간은 덧없을 정도로 짧게만 보인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瞬間)’, 숨 한 번 들였다 내쉬는 일식(一息), 그 둘을 합친 순식간(瞬息間)이 덧없이 빨리 흐르는 세월을 과장스럽게 표현할 때 쓸 수 있는 말들이다.

시간은 그렇게 쏜살 같이 날아가 사라진다. 광음사전(光陰似箭)이다. 조그만 문틈으로 휙 지나가는 하얀 망아지, 백구과극(白駒過隙)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물처럼 흘러 지나가는 세월이라고 해서 유년(流年), 유광(流光)이라는 말도 쓴다.

한 해 저무는 무렵, 이 세시(歲時)에는 늘 분주하다. 각종 모임에 휩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끔 저문 하늘을 쳐다보자. 도심의 상공에 달이라도 뜨면 좋다. 잘 보이지 않더라도 별을 헤아리면 좋다. 변하지 않는 것에 비춘 유한한 내 자리를 생각하며 삶의 여유를 우리 모두 함께 떠올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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