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2.27 14:26

(3) 동부전선에서-5

> 중공군의 공격은 늘 사전 포격과 함께 벌어졌다. 소련 군대 특유의 전법이었다. 지니고 있던 화력(火力)을 자신이 뚫어야 할 지점에 집중하는 방식이었다. 보통은 1시간 정도 이어지는 게 관례였다. 1951년 5월 16일 오후 4시경 중공군은 한국군 3군단의 방어지역 동쪽 견부(肩部)에 해당하는 미 10군단 예하 한국군 7사단의 방어지역을 집중 공격했다. 이곳을 뚫어 북동쪽에 있는 한국군 3군단의 배후(背後) 지역을 선점하려는 계획이었다. 치열한 포격을 동반한 중공군 공세에 힘겹게 버티던 한국군 7사단은 결국 물러섰다. 이로써 한국군 3군단은 서쪽 견부가 뚫려 후방을 내줄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사진은 전쟁 당시 중공군의 박격포 공격 장면이다.

 

> 중공군 공세는 치열했고, 또 치밀했다. 한국군 7사단 전면을 무너뜨린 중공군은 물밀 듯이 한국군 3군단 배후 지역으로 진입했다. 한국군 3군단 동쪽 지역에서는 북한군이 내습했다. 이로써 한국군 3군단은 서쪽의 중공군, 동쪽의 북한군에 의해 협격을 당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하루가 지난 뒤인 5월 17일 늦은 오후에 접어들면서 아군은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군단의 유일한 퇴로였던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 중대, 대대 병력에 의해 먼저 점령당한 데 이어 사단 규모에 가까운 병력이 당시에는 오마치 고개 남쪽에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사진은 강을 도하하면서 공격을 벌이는 중공군 부대의 모습이다.

 

> 서쪽의 견부가 뚫린 뒤 한국군 3군단은 갈팡질팡했다. 부대의 전투력을 가늠하는 잣대 중 중요한 하나가 바로 후퇴 능력이다. 이는 오랜 기간의 훈련을 거쳐야 ‘숙성’의 수준에 오를 수 있는 작업이다. 따라서 공격할 때보다 후퇴할 때 부대의 전투력, 훈련의 정도는 고스란히 드러나는 법이다. 적에 뚫려도 당황하지 않고 제대(梯隊)의 각 전투 수준을 유지하면서 물러서려면 끊임없는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그러나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당시의 한국군에게는 그런 훈련 바탕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중공군의 일격에 한국군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3군단 예하의 모든 부대는 중심을 잃고 내린천 주변의 인제 현리 벌판에 몰려들고 있었다. 사진은 전쟁 당시 한국군 부상자를 미군이 업어 옮기는 장면이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