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2.28 10:15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명화는 뭘까?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 근대의 수많은 유파들...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꼽을 수가 없다. 

대중성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아름답고 화려한 작품으로는 이 작품 이상을 꼽을 수 없다. 수많은 복제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키스 (The Kiss)>를 조심스레 추천해 본다. 나 역시 벨베데레 궁전에서 이 작품을 보았을 때의 감격을, 공기가 금빛으로 물들었던 느낌을 잊지 못하고 있다.

19세기 말 비엔나의 예술계는 정체 상태였다. 구태의연한 방식의 회화는 더 이상 신선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미술보다 음악에 더 관심을 가졌다. 젊은 미술가 그룹은 보수적인 예술계에 답답함을 느꼈다. 1897년, 그들은 '분리파'를 결성했고 그 리더로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적격이었다. 비엔나 분리파 화가들은 대중의 정체된 눈높이에서 벗어나 한 차원 높은 예술에 다가가고자 했다. 사회의 미적 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회화, 공예, 건축 모든 것들이 총체적인 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시작된 아르 누보 미술 운동이 비엔나로 전해졌다. 윌리엄 모리스는 예술은 사회에 봉사해야 하며 일상생활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 표현방식으로는 직선 없이 대칭 없이 자연의 유기적인 곡선이 만드는 역동성이었다. 분리파는 아르누보 정신을 '제체시온 슈틸'이란 이름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예술세계의 방향성을 조절해 나갔다.

그림밖에 모르던 클림트에게 여행이란 낯선 일이었다. 1903년 클림트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교를 여행한다. 이때 라벤나를 방문하면서 비잔틴 미술의 흔적들을 발견하고 자극을 받는다. 신의 시대였던 중세, 동로마 지역 영토를 기반으로 형성된 비잔틴 미술의 기법 중 하나는 모자이크였다. 정교회 성당 안을 장식하기 위해 보석과도 같은 색돌을 이용하여 내부를 꾸몄다. 이러한 전통은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단절되었다. 이후에도 비잔틴 지역은 이슬람의 지배 하에서 서유럽과의 교류가 끊어지게 된다. 비잔틴 미술의 황금은 보다 화려했고 형태는 추상적이었다. 모자이크의 색돌은 미묘한 충격을 주었다. 이미 함께 분리파 가운데 있었던 찰스 매킨토시의 아내, 마가렛 맥도날드도 일찍이 준보석을 사용하였다.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황금색을 잘 쓰던 클림트에게 그것은 계시와도 같았나 보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기하학적 조형 언어를 새로이 시도하게 되었으며 금색은 더욱 화려해졌다.

1905년, 클림트는 분리파 그룹에서 떠나간다. 대중에게 인기 있던 클림트가 예술의 상업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비난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은 허영과 사치가 만연했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투자해줄 수 있는 스폰서도 만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다양한 실험적 예술이 가능했다. 장식적 취향이 가득했던 클림트는 본격적으로 그림에 금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1907~1908년을 그의 황금 시기(golden period)라고 부른다.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클림트는 자유로웠다. 그의 황금시대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1907년, 황금시대의 절정을 알리는 이 놀라운 그림이 그려진다.

Gustav Klimt <The Kiss> 1907~1908

그림 안에서는 두 가지의 공간이 공존한다. 인체가 드러나는 부분은 정확한 형태의 스케치로 약간의 입체감을 버리지 않았지만 남녀의 드레스가 얽혀 있는 부분과 꽃이 핀 정원, 멀리 보이는 배경은 그야말로 평면적이면서 이 세계의 공간을 드러낸다. 여자의 드레스에 가득한 원형과 남자의 튜닉에 가득한 세로진 사각형은 얽혀 있는 두 사람의 몸통을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의 창백한 발목 위로 넘쳐흐르는 금빛의 식물은 아르누보 스타일의 곡선미가 넘친다.

두 남녀는 사랑에 눈먼 것 같다. 그들에게 세상은 전혀 보이지 않고 분리된 두 사람만이 한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다. 두 사람의 팔과 몸통은 서로 엉켜 있어 에로틱한 느낌이 가득하지만 남성의 보이지 않는 얼굴과 푸른빛이 도는 손, 여성의 창백한 얼굴과 뒤틀린 발 등은 타나토스의 흔적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간절히 사랑을 나누는 남녀 위에 생명과 죽음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꽃이 밀착된 정원이라던가 금빛 물감이 미세하게 흩뿌려진 배경의 비현실성을 통해서 더욱 극대화된다.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 순간은 현실을 넘어선 시간과 공간으로 변하는 것이며, 역으로 현실에서는 사랑의 완전한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양가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누구에게나 사랑에 눈 머는 순간이 있고, 마찬가지로 그림에 눈 머는 순간이 있다. 클림트의 그림 <키스>는 그러한 눈먼 순간들을 가장 많이 간직한 그림이 아닐까. 아름다운 그림들을 더욱 깊이 사랑하자. 사랑의 그림들에 하나하나 눈 멀다 보면 언젠가 진짜 인간에게도 사랑으로 눈 멀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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