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2.29 15:52

우리에게 이제는 낯선 단어로 변했지만 ‘인정(人定)’은 왕조 시절, 특히 조선시대에는 일상에서 우리와 바짝 붙어 지내던 낱말이었다.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는 시간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그 인정이라는 시간은 종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시계가 없던 시절이라 시간의 흐름은 물시계인 각루(刻漏), 또는 경루(更漏)로 쟀다. 밤 10시 무렵에 이르면 인정(人定)으로 규정해 종각에 매달아 놓은 대종(大鐘) 28번을 쳐서 사람들에게 통행금지를 알렸다. 새벽 4시 경에 이르러서는 파루(罷漏)라고 해서 종을 33번 때려 통행금지의 해제를 알렸다.

인정 때 28번의 종소리는 하늘의 별자리 28수(宿)를 가리켰고, 파루 때 33번의 종소리는 불교에서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제석천(帝釋天) 중심의 하늘 세계를 상징하는 숫자라고 설명한다. 하늘과 땅, 나아가 자연의 흐름과 사람의 일상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는 동양의 세계관에서 비롯한 설정으로 볼 수 있다.

인정은 ‘예전 왕조시절 사람들의 통행금지를 알렸던 시간’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글자 구성을 보면 ‘사람(人)이 제 자리를 찾아 드는(定) 일’로 풀 수 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펼치던 생각을 접고, 벌였던 뜻을 가두고 자리를 찾아 쉬라는 권유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하늘을 나는 새는 저녁 무렵이면 분주하다. 쉴 자리를 찾아 제 둥지로 찾아들어와 밤을 보낼 휴식 채비에 들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멀리 날아갔던 새도 따라서 그 무렵에는 제 둥지로 날아든다. 우리는 그 모습을 귀소(歸巢)라고 적기도 한다.

날짐승만 그렇지 않다. 들짐승 또한 제 굴을 찾아드는 무렵이 저녁이다. 야행성 동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들짐승 또한 둥지 찾아 돌아오는 새처럼 제가 쉴 굴(窟)로 돌아온다. 하늘과 땅, 그 공간에서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중생들을 그렇게 이끈다.

펼침이 있으면 들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천지자연의 운행에 실려 생명을 이어가는 모든 것들은 활동에 이어 안식(安息)이 반드시 필요하다. 저녁은 그런 생명체들의 대부분이 안정(安定)과 휴식(休息)에 들어서는 시간의 영역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람 또한 제 자리로 찾아들어 잠을 자거나 쉬어야 한다. 그를 가리키는 말이 인정(人定)일 테다.

저녁은 황혼(黃昏)으로 닿는다. 해가 기울어 서녘의 산 너머로 사라지려는 무렵이다. 한자에서는 보통 暮(모), 昏(혼)으로 많이 적는다. 때로는 ‘늦다’는 새김의 晩(만)으로 적기도 한다. 두 글자로 표현할 때는 황혼, 또는 박모(薄暮)로 적는다.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아 어둠을 뿌리는 무렵이다.

저녁이 지나 어둠이 깊어질 때는 보통 夜(야)로 적는다. 해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져 천지사방이 어둠에 갇히는 무렵이다. 夕(석)은 우리가 보통 ‘저녁’의 새김으로 받아들이지만 夜(야)와 같다고 이해해야 옳다. 새카만 밤이라고 해서 흑야(黑夜)로 적기도 한다. 宵(소) 또한 그런 밤을 일컫는 글자다.

자야(子夜), 오야(午夜)은 한밤중을 가리키는 옛 시간 단위인 子午(자오)를 써서 적은 표현이다. 밤이 깊어가는 무렵이다. 중야(中夜), 중석(中夕), 중소(中宵)라고 적어도 마찬가지 뜻이다. 그런 밤의 처음과 끝을 알리는 말이 철야(徹夜)다. 통소(通宵)라고 해도 좋다.

이제 곧 한 해의 마지막 밤이 다가온다. 우리는 그를 한 해의 끝에 닥치는 밤이라고 해서 제야(除夜), 제석(除夕)으로 적는다. 밤은 우리가 뭐라 해도 절로 깊어진다. 그 밤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알찬 안면(安眠)이요, 휴식이겠다.

그로써 길게 돌아온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가 머물 자리, 앞으로 나설 자리, 행장을 꾸려 다시 오를 길을 고루 생각해야 좋다. 보신각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독자들 모두 2016년 마지막의 밤 평안하고 고요하게 맞이하기를 기원한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