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7.01.02 09:26

2016년의 마지막 날 아이를 키우는 친구 집에 들렀다. 힘겹게 보람되게 한 해를 보냈던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이 다가올 기쁜 일들을 기대했다. '봄'이란 친구의 아이는 또랑또랑한 눈을 빛내며 엄마와 나를 바라보다가 제법 혼자서 놀기도 하고 이유식을 받아먹기도 했다. 아이는 볼 때마다 놀랍게 성장해, 친구는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겹다고 했다. 매일 새로운 것에 손 내미는 아이의 매일은 늘 도전이다.

묵은 해를 보내며 생각한다. 참 많이 도전했지만 참 많이 거절당했던 한 해였다. 공모전마다 할 수 있는 한 도전했고 죄다 떨어졌다. 그래도 관심 있는 분야를 더 많이 발견했고 즐거운 공부를 했다. 작게는 베이킹의 레시피를 몇 가지 더 배웠고, 코바늘뜨기의 쌩 기초를 배웠다. 항상 그렇듯이 깊이 있게 파고들어 끝을 보지는 못했지만 매일 무엇인가를 했으니 늘 보람은 있었다. 작은 보람이면 되지 않나 위안하던 한 해였다.

나는 매일의 삶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유랑의 날과 같다고 생각한다. 목적을 정해놓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개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내가 지금 가진 목적은 '목적'이라는 말만 멋지지 사실 임시방편일 뿐이다. 삶은 늘 방황의 이야기이다. 오히려 진짜 목적지는 실제 정착하는 곳에서 생긴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일은 그냥 기쁜 일이다. 새로운 분야에 내딛는 일은 늘 첫걸음이고 첫 걸음마이지만 이 걸음마는 곧이어 자유로운 발걸음이 된다. 이어지는 발걸음이 어디에 닿을지는 그 누구도, 자기 자신도 모른다. 다만 지금의 걸음마보다는 훨씬 신나고 즐거울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Georgios Jakovidis <The First steps (First Steps)> 1893.

그리스 화가 게오르기오스 야코비데스 (Georgios Jakobides, 1853~1932) 의 '첫걸음(The First Steps)'에는 첫걸음을 떼는 아이의 신난 감정이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아이의 양 팔을 붙들고 있는 어머니 역시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어느덧 성장해서 걷기를 시작한 아이가 대견해서 그간의 힘듦이 싹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팔이 꽉 붙들렸을지언정 아이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하다. 이 걸음마는 그간 일어서다 엉덩방아만 찧던 아이에게 최초의 성공 경험일지도 모른다.

그리스 레스보스 출신의 야코비데스는 다정한 장르화(풍속화, 일상을 그린 그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이들을 그린 그림이다. 아이를 그린 그림은 늘 인기가 좋다. 아이라는 존재 자체가 성장을 전제로 한 불완전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사람들은 아이에 마음을 보낸다.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야코비데스의 그림 중에서는 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주를 품에 안거나 걸음을 돕는 그림들이 눈에 띈다. 이 대조되는 인물들의 조합은 더 간절한 사랑을 강조한다.

아이는 이제 어디로 가닿게 될까. 그의 시선 닿는 곳에 그의 발걸음이 닿을 것이고, 그가 도착하는 곳을 그가 정복한 듯 신나할 것이다. 이런 첫 마음으로 2017년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시도하는 일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을 정복하는 것처럼 성취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첫걸음이 부족하고 아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을 해도 성에 안 차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첫걸음이 없으면 다음 걸음도 없고 새로운 사건도 없다. 이 걸음이 유랑하는 곳이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당신의 호기심이 가닿는 곳을 찾아가라. 힘 있는 발걸음을 디뎌 정복하라. 당신의 발걸음 닿는 그곳이 어디든 아름다운 일들이 있을 것이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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