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7.01.03 13:37

일제가 이 땅을 강점했을 때 민간에서 유행한 노래 하나가 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로 시작하는 ‘희망가’다. 본래는 ‘When we arrive at home’이라는 찬송가였다. 단조롭기는 하지만 제법 울림을 주는 곡조 때문에 일본에서도 번안을 거쳐 유행했던 노래다.

여기서 등장하는 풍진은 한자로 風塵이다. 바람과 먼지를 가리키는 글자의 조합이다. 그러나 담은 뜻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바람 불어 먼지 가득 이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 머물러 사는 곳을 떠나 먼 데로 나아가는 길의 신산(辛酸)함, 정치와 벼슬자리 등의 갖은 곡절, 안정과는 거리가 먼 혼잡스러운 세상살이 등을 가리킨다.

이 여러 함의 중에서 올해의 시작과 함께 떠올리고 싶은 뜻은 ‘바람 불어 먼지 가득한 먼 데로의 여행길’이다. 우리가 올 한 해 떠나고 거여야 할 여로(旅路)에는 아마도 내내 바람이 몰려와 먼지가 가득 차오를 듯해서다. 그 만큼 우리가 맞이하는 국내외의 환경이 열악하다.

얼마 전에 쓴 ‘풍우(風雨)’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이런 몇 정황은 소개했다. 비와 바람, 바람에 이어 닥치는 한설(寒雪), 그리고 바람이 일어 물결 또한 거세지는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듯하다. 그런 여행길에는 침착한 마음, 길을 마침내 모두 가려는 꿋꿋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일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불투명한 변수를 극복하며 나아가야 하는 여행길은 고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를 우리는 험로(險路)라고도 부르고, 기구(崎嶇)라고도 적는다. 발산(跋山)과 섭수(涉水)라는 말도 있다. 앞의 발산은 산을 넘는 행위다. 뒤의 섭수는 맨몸으로 위험한 물길을 건너는 일이다.

둘을 한 데 묶어 발산섭수(跋山涉水)라고 적어 여정의 험난함을 강조할 수도 있다. 우리식 표현인 ‘산 넘고 물 건너’에 해당하는 한자 성어는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는 逾山越海(유산월해)다. 풀이는 말 그대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넌다는 뜻이다.

풍찬노숙(風餐露宿)도 그와 병렬할 수 있는 말이다. 여행길에서 바람을 맞고 이슬 내려앉은 자리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다. 고단한 여정을 잘 표현하는 성어다. 水宿山行(수숙산행)이라는 말도 있다. 밤에 만난 물길에서는 잠을 자고, 낮에는 산을 넘는다는 뜻이다.

그 길에 바람이 잦아들고 먼지도 피어오르지 않아야 좋다. 그러나 대개는 기상의 잦은 변화로 날씨는 사람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찬바람이 불고 시야를 가리는 어두운 기상이 몰아닥치는 경우가 바로 풍진(風塵)이다.

중국에서는 洗塵(세진)이라는 말을 곧잘 쓴다. 먼 여행길, 온갖 풍상(風霜)이 번져 풍진마저 가득했던 길, 험난해서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길에서 가족과 친지가 반겨주는 고향으로 돌아온 이를 반겨주는 이벤트다. 말 그대로 풀면 ‘먼지를 씻어주는 일’이다.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렸던 여행길의 나그네를 풍성한 요리와 단 술 등으로 달래는 의식이다. 생계를 위해 먼 길에 나아갔다 돌아온 사람, 유학에서 돌아온 자녀, 외지에서 고생 끝에 돌아온 친지 등을 달래주는 자리다. 요즘도 중국인의 일상에서는 흔한 의식이다.

우리의 기업들 시무식 분위기가 결연하고 비장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국내와 국외에서 닥치는 환경이 아주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나라 경제의 성장을 크게 떠받치고 있는 우리 기업들의 분투를 기대한다. 한 해 내내 외로운 싸움에 몰두하다 많은 성과를 얻어 오기 바란다. 그래서 올해가 마감하는 연말에는 풍성한 먼지 씻어주기 행사가 벌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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