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7.01.04 15:22

“밤안개가 가득히 쓸쓸한 이 거리, 밤이 새도록 가득히 무심한 밤안개….” 1962년 취입해 시쳇말로 ‘대박’이 났던 가수 현미의 ‘밤안개’ 첫 구절이다. 밤새도록 제 사랑을 찾아 헤매던 길에 자욱했던 안개에는 쓸쓸함과 함께 그리움의 정조(情調)가 담겼다.

장충단 공원을 배회하던 배호도 마찬가지다. 안개 자욱한 그 공원에서 “누구를 찾아 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라며 헤어진 사랑의 추억을 되씹고 있다. 장충단 공원의 짙은 안개 속 정념(情念) 또한 공감의 폭을 넓히고 있다.

안개는 공기 속의 수분이 많아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눈을 가리지만, 촉촉이 닿는 공기 속 수분에 사람들의 정감은 차분히 가라앉는 경우도 많다. 안개 말고도 대기에 뿌옇게 무엇인가 낄 때가 있다. 그런 현상은 煙(연 또는 烟), 靄(애), 嵐(람)으로 적는다.

셋 모두 보통은 ‘아지랑이’ 정도로 적을 수 있는 현상이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부옇게 번져 시야를 흐릿하게 만드는 대기 현상들이다. 연화(煙花)는 흔히 ‘봄의 경치’라고 풀이하는데, 정확하게는 겨울의 추위가 풀려 수분이 많아지면서 부옇게 변하는 봄 날씨 속의 꽃을 지칭한다.

나중에 밤하늘에 쏘아 올리는 불꽃의 의미도 얻지만 원래는 그런 봄의 기후적인 특성과 피어오르는 꽃을 형용한 말이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친구였던 맹호연(孟浩然)과 이별하면서 적은 “煙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라는 시구에 등장한다. 지금은 꽃 피는 좋은 봄날에 어디에 좋은 구경 가는 경우를 일컫는 성어 정도로 인기를 끄는 말이다.

靄(애)가 등장하는 문학적 표현으로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 먼 곳으로 떠나는 북송(北宋)의 문인 유영(柳永)이 “저녁 아지랑이 짙은 남녘 하늘 넓고 넓다(暮靄沈沈楚天闊)”고 했던 구절이 유명하다. 嵐(람)은 저녁의 먼 산에 낀 어스름한 기운, 즉 남기(嵐氣)라는 현상으로 즐겨 문학의 소재로 쓰였다.

그러나 다 공기 맑아 편했던 옛 시절의 이야기다. 이제는 눈앞에 무언가 부옇게 끼면 마스크부터 찾아야 하는 지경으로 변했다. 이 즈음에 살펴 볼 한자가 霾(매)다. 직접적인 뜻은 ‘흙비’다. 빗방울 안에 흙먼지가 가득 담긴 비다. 매우(霾雨)는 그런 흙비를 직접 지칭하는 낱말이다. 해매(海霾)는 심할 정도로 낀 바다 위의 안개다.

중국에서는 요즘 霧霾(무매)라는 말이 공포 그 자체다. ‘우마이’가 현지 발음이다. 인체에 해를 끼치는 심각한 공해 성분의 스모그가 잔뜩 담긴 안개다. 사람의 시계(視界)를 아주 좁은 곳으로 가두는 정도가 아니라 삶을 이어가는 가장 기초적인 동작인 호흡에 지장을 준다. 그러니 낭만은커녕 원망을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독가스에 가까운 그런 안개가 중국을 덮었다가 계절의 바람을 따라 우리에게 자주 닥치는 요즘이다. 그래서 아침 창 너머로 잔뜩 안개라도 끼면 기분이 먼저 우울해진다. 현미의 ‘밤안개’,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읊조릴 여유마저 없어진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고 했지. 안개 자욱한 곳에 갇혀 앞으로 닥칠 상황이 불안스러워질 때의 상황 말이다.

하늘에는 자꾸 건강을 위협하는 짙은 공해 성분의 안개가 끼고, 시야는 그로써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2017년의 새해 벽두에 맞는 우리 천후(天候),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나라 전반의 사정이 꼭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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