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7.01.18 15:39

소통이라는 주제는 사람 사회에서 늘 화제다. 소통이 중요하다는 점을 미뤄 알 수 있겠고, 또 그 만큼 소통이 어렵다는 점도 보여줄지 모른다. 가장 차원이 높은 소통은 아마도 마음과 마음이 서로 호응하는 방식일 것이다. 굳이 말이나 요란한 몸짓이 아니더라도 마음만으로 함께 뜻을 이루는 그런 경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일화가 염화미소(拈花微笑)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이라고도 적는다. 석가모니 부처의 영산(靈山) 설법에서 나온 일화다. 부처가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제자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알아듣고 미소로 화답했다는 내용이다.

불교 선종(禪宗)이 중시하는 방식이다. 결국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만들어지는 이유다.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경계에 닿는 일은 쉽지 않다. 고도의 수련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오랜 축적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다.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일반 사람들은 눈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눈은 마음의 창(窓)이다. 생각과 감정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신체 기관의 하나다. 아니, 어쩌면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는 우리 몸의 유일한 기관일지 모른다.

이 눈은 특별하다. 다른 감각기관들은 피부의 일부가 변해 발달했다. 그에 비해 눈은 뇌의 일부가 망막에 직접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마치 호기심에 찬 뇌가 바깥세상을 향해 뻗어 나온 것 같다”는 게 <인간의 모든 감각>(최현석 저, 서해문집)이라는 책의 설명이다.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형상 정보도 모두 이 눈을 거친다. 눈으로 들어온 정보는 뇌에 바로 전해져 마음을 이루는 신경의 ‘바다’에 잠긴다. 다시 내 안에서 이뤄진 감정과 이성적인 판단 등이 눈을 통해 바깥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눈은 사람과 사람이 교감하는 통로다.

눈의 동공은 크게 8㎜까지 커지고, 작게는 2㎜까지 줄어든다. 이 동공이 커졌다가 줄어드는 데에는 빛에 대한 반응 외에 감정도 함께 작용한다. 상대방에게 좋은 감정을 품으면 동공은 커진다. ‘부드러운 눈길’의 막후 주역은 결국 눈동자의 움직임이다.

미운 감정을 품으면 동공은 작아질 수 있다. 검은색 동공이 줄면서 흰자위는 상대적으로 커 보인다. 게다가 흘기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백안시(白眼視)’의 상태로 변한다. 예전에 소개했던 내용이다.

눈에 관한 일화와 조어(造語)는 그래서 많다. 일자무식이었던 중국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장수 여몽(呂蒙)이 노력 끝에 수준 높은 학문을 쌓자 선비들이 놀라서 지켜봤다는 ‘괄목(刮目)’의 스토리가 좋은 예다. 눈을 비비고 상대방의 성취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세다. 괄목상대(刮目相對), 괄목상간(刮目相看) 등 성어로도 적는다.

얼굴과 함께 눈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면목(面目)’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신경을 집중하면 “이목(耳目)을 모은다”고 말한다. 반목(反目)은 아예 얼굴을 돌려 상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행위다. 극도의 반감과 미움, 공격성이 담긴 단어다. 눈이 등장하는 단어로 치면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경우다.

대권을 향한 주자들의 말이 거세진다. 친일(親日)과 독재(獨裁)라는 말을 함부로 떠올리며 “이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악한 편 가르기다. 기준도 모호하고 때도 지난 말들이다. 이렇게 가르고 또 갈라 이 사회를 어디까지 찢어 놓으려는 심산인지 답답하다. 반목에는 능하되 화합에는 매우 서툰 정치인들이 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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