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7.01.19 17:50
[뉴스웍스=한동수기자] “안줘도 패고 줘도 패고...기업들이 많이 힘들다”
지난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고용노동부장관 초청 30대그룹 CEO 간담회에 참석한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의 말이다. 이날 김 부회장의 발언이 있던 시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서울구치소에서 법원의 영장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19일 새벽 법원은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최순실게이트 주범은 기업인이 아니다
전날 CEO간담회에 참석한 한 인사는 “최순실게이트는 대통령이 용인하고 민간인이 국가운영을 좌지우지한 국정농단 사건”이라며 “최근 특검 수사를 보면 국민들이 기업들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주범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고 속내를 밝혔다.
또 다른 인사는 “민간인 최순실이 대통령의 권력을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고 대통령은 기업들에게 돈을 모금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돈을 내라고 강요한 측에 대한 수사부터 진행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의 영장을 기각한 조의연 영장전담 부장판사의 결정문에도 피의자(이 부회장)에 대한 뇌물공여죄를 적용하기 위해 뇌물수수자에 대한 수사가 미진하다는 취지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조 판사는 결정문에서 “뇌물범죄의 요건이 되는 대가관계와 부정한 청탁 등에 대한 현재까지의 소명 정도, 각종 지원 경위에 관한 구체적 사실관계와 그 법률적 평가를 둘러싼 다툼의 여지, 관련자 조사를 포함해 현재까지 이루어진 수사 내용과 진행 경과 등에 비추어 볼 때 현 단계에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이정렬 전 부장판사(법무법인 동안 사무장)는 이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조 부장판사의 결정문에서 ‘현재까지’, '현 단계에서의 구속'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며 “뇌물을 받은 사람, 이 사건에선 (특검이)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한 후 영장을 발부해야 한다는 취지로 영장기각 결정문을 작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 호의, 거절해야 '무죄'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나설 때 ‘저희는 괜찮습니다.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해야만 법 위반이 안되는 것을 잘 안다”며 “그러나 대통령의 이 같은 요구에 걸려든 기업인의 입장은 감사한 것이 아니고 앞이 캄캄해진다”고 말했다.
예컨대, 권력자가 금품을 요구한 후 기업의 당면 현안을 파악,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나섰을 때, 기업인이 ‘정의(正義)’ 운운하며 그 도움을 거절하면, 권력자는 어떻게 하겠는가. 참 청렴한 기업인이라고 칭찬만 할 것으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기업인은 괜한 거절로 권력자가 당면 현안 문제에 재를 뿌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한다.
재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권력자가 기부를 강요할 때 거절할 수 없어 갖다 주지만 반대급부로 무엇인가를 도와준다고 할 때 그물에 걸려든 것과 마찬가지”라며 “호의에 ‘감사하다’고 받아들이면 이미 (달라고해서)전달한 금품일지라도 뇌물로 바뀌고, 호의를 거절하면 오히려 괘씸죄에 걸린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금품을 요구할 경우, 기업인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경총의 김 부회장이 “안줘도 패고 줘도 팬다”고 말한 의미가 이런 것이다.
기업인도 보호받을 '권리'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비리사건이 터질때마다 대기업과 기업인만 비판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자들이 기업인들의 약점을 잡고 금품을 요구하는 관행을 없앨수 있는 법을 제정해야한다”며 “법으로 기업인을 보호하지 않는한 인허가권은 물론 세무감사까지 할 수 있는 권력자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업인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선 정경유착 비리가 끊이질 않는다. 국민은 열받고 기업인을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우리 사회에 이를 위한 자정방안은 진정 없는 것인가. 도덕성, 정의만 강조할 때가 아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자 의무다. 돈 많은 대기업 총수라도 5년마다 바뀌는 권력자 앞에서 약자라면 그를 보호해야하는 것이 법이다. 기업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국민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깨끗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