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7.01.23 17:46

(3) 동부전선에서-6

> 현지 전투 때 촬영한 사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사진이 대표적으로 전해져 온다. 그나마 중공군이 촬영한 당시 국군 포로 사진이다. 얼마나 많은 국군 3군단의 병력이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는지를 보여준다. 국군 3군단 후방의 유일한 후퇴로인 오마치 고개에 진출한 중공군 병력으로 인해 아군은 당황했다. 누구나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후방을 내준 뒤가 문제였다. 국군 사령탑은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먼저 자리를 떴다. “후방에서 회의가 있다”는 말을 하고서다. 전선 지휘를 군단 예하 3사단장과 9단장에게 일임했다. 그러나 이 두 사단장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 여파로 잡힌 국군 포로들이 중공군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모습이 처연하기만 하다.

 

> 1951년 5월 16일 중공군의 공세 시작 뒤 전선은 바로 엉켰다. 특히 아군의 방어지역이 그랬다. 오마치가 점령당한 뒤 상황은 아군의 갈팡질팡이었다.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했다. 후퇴의 흐름을 되돌려 북에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 맞서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덤비거나,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오마치 고개에 전력을 투입해 퇴로를 뚫어야 했다. 그 대신 아군 지휘관은 무기력하게 도망칠 생각만 했던 듯하다. 이들은 해발 1500미터에 이르는 옆의 방태산을 넘었다고 한다. 그것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 계급장을 떼고, 군모도 벗은 채 산을 넘었다는 것이다. 사진은 현리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강원 지역을 방어하는 미군의 진지 모습이다.

 

> 한국군 3군단은 그렇듯 허무하게 무너졌다. 6.25전쟁 기간 아군의 최대, 최고 패배로 기록하는 현리 전투의 결말이다. 3군단 예하의 3사단과 9사단은 수습 병력 4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정도면 와해를 넘어 붕괴라고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패배에서도 가장 참담한 참패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무너진 3군단을 넘어 중공군은 대관령으로 이동했다. 아군은 오마치 고개를 중심으로 종심이 깊게 파여 동서 양쪽이 주머니처럼 축 늘어진 전선 형국을 맞았다. 동쪽이 뚫리면 강원도 강릉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참이었다. 이곳을 방어 중이었던 병력은 백선엽 소장의 국군 1군단이었다. 급히 진부령 인근의 국군 3군단 본부로 날아온 신임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군 1군단과 미 3사단을 출동시켰다. 어떻게 해서든 오마치를 넘어 내려오는 중공군의 발길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주문진 모래사장에 주둔 중이었던 한국군 1군단 사령탑이 작전 숙의를 벌이고 있는 사진이다. 가운데 모여 있는 사람 중 오른쪽 둘째가 백선엽 군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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