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7.01.25 10:54

부족한 에너지를 꼭 보충해야하는 일요일. 그런 날에도 꼭 늦잠의 선을 넘기지 않는 시간이 있다. 먼저 집을 나서는 부모님과 동생을 잠결에 배웅하고도 또 자다가 아홉시 반쯤 되면 억지로 눈을 뜬다. SBS TV 프로그램 ‘동물농장’을 보고 싶어서다.

그중에서도 길 잃거나 가엾은 동물들을 측은지심으로 살피는 사람 이야기에 마음이 간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고양이에게 이불로 집을 만들어주고 사료를 챙겨주시는 아주머님, 갑자기 자기 집으로 뛰어들어온 강아지를 반려가족으로 받아들여주는 어르신, 위험한 장소에 갇힌 고양이를 구조해달라고 제보하는 사람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유사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 있다. 헬렌 앨링엄(Helen Mary Elizabeth Allingham)의 ‘글로스터셔 주 위팅턴 코트의 계단(The Staircase, Whittington Court, Gloucestershire)’이다.

Helen Allingham, The Staircase, Whittington Court, Gloucestershire, watercolor on paper

이 그림은 계단을 걸어내려오는 여성이 계단을 뛰어올라오다 멈춘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전면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온화한 빛이 화면을 감싸고 있다. 여성은 검은 고양이에 놀란 감이 없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검은 고양이를 불길한 동물로 여겼을 텐데도 그렇다. 이 작고 검은 생명은 여성에게 낯설지 않다. 다정한 두 생명 가운데 온화함만 있다. 평화와 안정, 그리고 다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이 그림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싶다. 내 심장도 조금 따뜻해지도록.

헬렌 앨링엄(Helen Mary Elizabeth Allingham, 1848~1926)은 에너지가 넘치는 여성 화가라는 것 말고 적절한 수식어가 없을 것 같다. 그녀의 가정은 예술적이었다. 이미 잘 알려진 예술가였던 외할머니와 이모를 접하면서 어린 헬렌이 미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버밍엄 디자인학교와 왕립 디자인학교를 거쳐 왕립예술학교까지, 그야말로 원하는 곳마다 순적하게 합격하여 가진 재능을 가꾸어나갔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고 내내 가난했던 그녀는 생활을 위해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시작하고 그림으로 먹고 살 만한 수준에 이른다.

그러다 헬렌은 실력 좋은 편집자의 눈에 들게 되었고, 새로 창간하는 잡지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고정적인 삽화 일을 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기도 높아졌다. 경제적인 사정도 무척 좋아졌다. 찾는 이가 많다 보니 학교를 쉬어야 하기까지 했다.

이같은 삽화가로서의 열정적인 활동 가운데 만난 남편, 윌리엄 앨링엄은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었고 헬렌은 그간의 일감 폭주를 잠시 멈추고 좋아하는 수채화를 그릴 수 있게 됐다. 위에서 소개한 그림 ‘계단’은 제작 시기가 알려져 있진 않으나 아마도 그녀가 수채화에 푹 빠져있던 결혼 이후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편과 살던 전원생활 가운데 헬렌은 정원과 꽃, 따뜻한 사람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평화로운 목가 풍경에는 위안이 담겨 있었고 인기가 좋았다.

가슴을 울리는 마주침은 언제나 '심쿵'이고 그런 만남은 언제나 감격스럽다. 사람과 사람과의 마주침은 로맨틱하거나 감동적이지만 사람과 동물, 동물과 동물과의 마주침은 다정하고 또 다정하다. 그 다정함은 온기로 다가오고 온기는 피부에 스며들어 오래 잊히지 않는다.

작은 심장과의 마주침은 특별히 더 설렌다. 작디작은 심장이 팔딱팔딱 뛸 때의 진동은 보통의 그것보다 더 강렬하다. 작은 생명들은 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에게 관대하다. 다가와 주고 몸을 기대어 준다. 그 팔딱거리는 심장 박동을 손끝으로 전해 준다. 자신을 해할 수도 있는 커다란 사람에게 몸을 내어주고 온기를 내어 주는 관대함 때문에 사람은 감동한다. 그 감동 때문에 마음에 서린 얼음이 약간이나마 녹는다.

사람은 감동을 받으면 좀 살기 나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감동은 의외의 장소와 인물, 그리고 의외의 생명에게서 온다. 세상에 마주치는 모든 심장과 가슴이 맞닿게 되기를. 그래서 서늘한 심장이 온기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