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7.02.15 10:23

포털사이트 메인에 뜬 뉴스에서 잊고 있었던 동기 K의 소식을 읽었다. 십여 년 전 화가의 모습으로 미술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K는 이제 큰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가 되어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몰랐던 K의 속사정과 학교를 졸업한 후 알 수 없었던 K의 어려움을 기사로 읽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소식을 몰랐던 지인의 소식을 시간이 흘러 우연히 알게 될 때의 잔잔한 기쁨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와글와글 모인 졸업가운을 입은 사람들,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웃음 지었지만 각각 어떤 막막함으로 돌아섰는지를 기억한다. 진로가 결정된 사람은 몇 없었다. 졸업식 이후 뿔뿔이 흩어진 후 어떻게 다시 만날까. 기약이 없다. 졸업은 꼭 '민들레 홀씨' 같다. 민들레 홀씨 날리듯 뿔뿔이 흩어진 후에는 이전처럼 다시 만날 수 없다. 기나긴 바람결에 휘날려 어디까지 떠나갈지 모른다. 홀씨 하나하나가 어디에 머물지 모른다.

Laurits Andersen Ring <In the Month of June> 1899

라우리츠 안데르센 링의 그림 <6월 안에서>는 링이 1900년 세계 박람회에서 동메달을 따기 전 해 그린 작품이다. 링 그림에 담긴 고요한 시간과 잔잔한 아름다움이 빛난다. 소녀의 얼굴과 손목은 성마르고 금발 섞인 땋은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등 뒤로 늘어져 있다. 소녀의 검은 옷과 누런 들판이 대조를 이루어 선명하다. 노란 꽃이 군데군데 핀 들판 가운데 잘 익어 펼쳐진 민들레 솜털이 보드라이 흔들리고 있다. 민들레 가득한 들판에 기대어 앉은 소녀가 입바람으로 홀씨를 날리려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소녀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민들레 홀씨는 바람에 실려 여기저기 날아갈 것이다. 졸업과 함께 우리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라우리츠 안데르센 링(Laurits Andersen Ring, 1854~1933)은 당시 유럽의 문화 변두리 같았던 덴마크에 상징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를 개척한 작가로, 섬세하면서 날카로운 시선과 자유분방하고 도전정신이 강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19세부터 회화 수업을 시작하고 21세부터 예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화가는 전통에 매이는 것을 힘겨워했으며, 자유로움을 원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맸다.

화가마다 좋아하는 주제나 표현하는 방식이 있다. 링의 그림은 동적이고 희망차다기보다 순간을 멈춘 듯 정적이고 사색적이다. 화가는 탁 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비스듯한 뒷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의 구도를 왕왕 사용한다. 형태 표현은 단정하나 터치 자체는 부드럽다. 섬세한 표현 안에 스며든 특유의 공허감과 멜랑콜리가 잔잔히 빛나 아름답다.

바람결이 흐르고 흐르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고 흐른다. 시간을 타고 살아가다 문득 발견한다. 깊이 뿌리내리고 꽃을 피운 민들레를 발견한다. 전시장에 가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동기를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신문지상에서 기사로 등장한 동기를 보고 반가워한다. TV에서 큰 상을 탄 동기의 얼굴을 보기도 한다. 서점에서 뒤적이던 책날개에서 동기의 프로필을 발견하기도 하고, 동네 도서관에 강의하러 온 동기를 만나기도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뿌리내리고 훌륭하게 꽃피운 그들의 삶을 확인할 때마다 민들레 홀씨 결같이 잔잔한 기쁨을 느낀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 가사를 "사람이 꽃만큼 아름다워"라고 바꾸어 불러보고 싶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못 믿겠지만, 어디서든 사람은 '꽃만큼은' 살아간다는 것을 믿는다. 민들레 홀씨 바람에 날리듯 인간의 인생도 시간에 떠밀려 흘러간다. 우연처럼 닿은 곳에서 인간은 어떻게든 뿌리내린다. 노랗게 피었다가 보드라운 씨앗도 맺는다. 탐스러운 꽃이어도 작은 꽃이어도 시든 꽃이어도 어떻게든 피어난다. 어떻게든 사람은 꽃을 피운다. 인생은 질기고 사람은 꽃 같다. 질기고 질긴 인생이다. 진정 사람은 질긴 꽃만큼 아름답다. 민들레 홀씨 날리듯 아름답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