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1.23 09:30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의 생전 모습이다. 철저한 개혁, 나아가 공산당의 정치개혁까지 주장함으로써 사망 직후 6.4천안문 사태까지 촉발했던 중국 현대사 속 풍운의 인물이다.

지난 11월 20일은 중국에서 정치적으로 의미가 작지 않은 날이었다. 1989년 6.4 천안문 사태와 직접 관련이 있는 한 정치인의 탄생 100주년에 해당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그가 왜 문제의 인물일까. 우선 그는 ‘과격한’ 개혁적 성향 때문에 1980년대의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의 눈 밖에 났다. 비록 공산당 서열 1위 총서기 자리에 있었으나, 실제 권력의 배후를 장악했던 실권자에게 숙청당한 모양새였다. 그 해가 1987년이었다. 

울분의 세월을 보내던 후야오방은 결국 1987년 5월 심장병으로 급서했고, 이는 마침내 정치적 개혁을 열망하던 대학생들에 의해 6.4천안문 사태로 이어져 베이징은 잠시 피의 바다를 이루고 말았다. 그 뒤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에서 6.4천안문 사태는 줄곧 입에 함부로 올리지 못할 대상으로 변했고, 사태의 그림자였던 후야오방 역시 정치적으로는 금기처럼 여겨지던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중국 공산당은 과거의 금기를 깨고 후야오방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전 중국 주석이자 공산당 총서기 후진타오(胡錦濤)가 후야오방 탄생 9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고, 그 자리에 해외 일정으로 참석지 못한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대독(代讀)케 했다. 

다시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5년 11월 20일. 중국 최고 지도부는 다시 후야오방 탄생 100주년 기념회를 열었다. 중국 공산당 최고 서열인 시진핑(習近平)이 참석했다. 후야오방 사망 이후 그를 기념하는 자리에 등장한 중국 최고 권력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후야오방에 최고의 찬사를 올렸다.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키고 이상에 헌신했다(堅守信仰, 獻身理想)” “마음은 국민 속에 있었으며, 이익은 세상에 돌렸다(心在人民, 利歸天下)” “실사구시를 통해 개척에 앞장섰다(實事求是, 勇于開拓)” “공정한 정의파에, 청렴결백을 스스로 지켰다(公道正派, 廉潔自律)” 등의 표현이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은 지금도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의 흔들리지 않는 노선이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덩샤오핑의 오류에도 둔감하지 않다.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이 내친 후야오방, 그로써 한동안 늦춰진 전방위적 개혁의 정신에 중국 공산당은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마침 시진핑의 부친인 시중쉰(習仲勳)은 후야오방의 유일한 지지자였다. 그래서 시진핑은 후야오방의 덕을 더 기리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점은 시진핑의 개인사에 관한 영역이다. 그로써만 중국 공산당의 지금과 같은 행보를 다 설명할 수 없다. 그에 앞서 10년 전 후진타오가 후야오방을 기념한 맥락을 살펴봐도 그렇다.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장점과 함께 단점을 들여다볼 줄 아는 집단이다. 현재의 문제를 과거의 어느 한 경험에 비추어 살피는 안목도 치밀하다. 아울러 현재의 능력 이상으로 무언가를 해치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후야오방을 기념하면서 그가 추진했던 진보적인 정치개혁을 언급하지 않는 중국 공산당의 사려(思慮)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과거의 경험에서 오늘의 교훈을 찾고, 제 현재의 능력보다 너무 앞서나가는 것도 삼가는 행동 양식. 중국 공산당은 그런 점에서 심모(深謀)와 원려(遠慮)가 다 들어있는 집단으로 비친다. 개혁개방 30여 년 만에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근저에는 집권 공산당의 그런 노련함과 숙성함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후야오방 탄생 100주년을 살핀 뒤 찾아드는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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