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7.03.13 10:04

"적금 만기가 돌아오는 기분일 테죠. 두근두근 신나겠어요."

부산에는 벌써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린 날, 나의 친애하는 국어선생님 K가 벚꽃 엔딩의 작곡가 장범준을 부러워하며 한 말이다. 한국사람 중에 장범준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재치 있는 K 덕에 까르르 웃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집 근처 카페에는 ‘벚꽃 엔딩’이 울려 퍼진다. 언제부터인지 ‘벚꽃 엔딩’은 봄날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벚꽃 엔딩’이 들리는 동안은 봄이라고 보아도 된다. 그렇다. 이제는 영락없이 봄날이다.

계절은 색채와 함께 오고 간다. 밝은 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 덕에 백화점과 쇼핑몰에서 '봄옷' 카테고리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봄에 입는 옷의 색깔만큼은 분명하다. 사람의 마음은 행동으로 무심결에 드러나는 법이어서 맑고 환한 옷을 고르면 그들의 마음도 봄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인간인 화가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화가가 사용하는 색채만큼 화가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없다. 여기 압도하는 봄날 가운데 감격을 숨기지 못하는 화가가 있다. ‘벚꽃 엔딩’만 들어도 '분홍 분홍' 설레는 이들에게 요세프 리플-로나이의 분홍 그림 ‘벚꽃 만개’를 소개한다.

Jozsef Rippl-Ronai <Cherry tree blossoms> 1909

그림은 대담하기 그지없다. 풍경 가운데 선 나무와 주인공은 화면의 중심에서 시선을 빼앗는다. 압도적인 붉음과 흰빛, 그리고 배어 나오는 분홍빛이 화면을 장악한다. 봄빛 가득한 색채 덕분에 그림은 무겁지 않고 그윽해진다. 그림의 흐드러진 붓질은 셀 수 없이 가득한 꽃잎을 표현하면서 화가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준다.

헝가리의 작가 요세프 리플-로나이(Jozsef Rippl-Ronai, 1861~1927)는 본디 약제사였던 이과인이었으나 타고난 색채 감각, 왕성한 의욕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뮌헨으로 유학하면서 험난한 미술 인생을 시작한다. 뮌헨과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화가를 가장 크게 각성시킨 것은 나비파 화가인 보나르와의 만남이었다. 새로운 예술의 예언자임을 자처하였으며 신비함과 상징적 색채 사용을 특징으로 하는 나비파와의 만남은 리플-로나이에게 색채감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나비파에 적을 둔 후 화가의 색채 감각은 나날이 예민해져 갔다. 상징적이며 표현적인 색채를 활용해 장식적인 작품을 그렸다.

고국으로 돌아온 후 화가는 성공적인 활동을 이어간다. 1909년에 그려진 이 작품 <벚꽃 만개(Cherry tree blossoms)>역시 상징적 색채 사용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당시의 그림을 보면 화가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스테인드글라스 스타일의 색채감과 외곽선을 활용한 작품이 많은데 그야말로 터치는 강렬하고 색채는 표현적이다. 이 그림은 그런 그림만큼 외곽선이나 터치가 두드러지지 않지만, 그림은 아름답고 색채만큼은 상징적이기 그지없다.

보랏빛 옷에 검은 모자를 쓴 여성이 벚나무에 얼굴을 묻은 채 기대어 섰다. 아무래도 울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봄의 색채와 봄의 향기는 그녀를 감싸고 보호한다. 벚꽃이 만개한 이유는 그것이다. 사람을 덮어주기 위한 것이다. 벚꽃 향이 그득한 이유는 그것이다. 사람을 감싸기 위한 것이다. 분홍만큼 사랑과 위로를 상징하는 색채가 있을까. 화면 가득한 봄날이 감싸 안는 위로에 화가도 관람자도 감격스럽다.

나는 세상 모든 것이 신이 인간을 위해 지은 결과물이라고 믿는다. 세상 모든 것이 인간을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경험으로 추정했을 때 봄날은 더욱 포근한 선물이다. 봄날의 아름다움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바삐 찾아온다. 봄날이 필요한 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봄도 벚꽃도 존재한다. 분홍 가득 흐드러진 벚꽃은 위로를 선사한다. 뒤이어 찾아올 씁쓸하고 달콤한 열매까지 기대할 것도 없다. 다급히 다가온 위로만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설레며 벚꽃을 기다리고 ‘벚꽃 엔딩’의 작곡가에게 기꺼이 연금을 지불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이미 훌쩍 봄으로 다가온 위로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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