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7.04.17 09:44

산업 혁명과 시민 혁명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근대라고 하며, 이때 다양하게 발생한 미술 유파를 근대미술이라고 한다. 근대라는 시대적 공통점 하에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등 수많은 미술이 발생하지만, 가장 넓고 풍성하게 긴 생명력을 가지고 인기를 끈 것은 인상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상주의는 현대미술의 시작, 특히 모더니즘 미술의 시작점으로도 불린다. 모더니즘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달라진 도시화 세대를 표현하는 방식으로도 볼 수 있는데, 미술에 있어서는 인상주의가 앞장서 그 역할을 맡았다. 인상주의는 시각 언어를 중시하면서 새로운 보는 방식을 발견하였고, 기존의 이미지를 타파하였으며, 그 방식은 지극히도 개성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라는 가치를 가지고 한데 모인 작가들의 그림도 자세히 살펴보면 제각각이다.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 인상주의 작가들은 '새로운 보는 방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각자의 개성을 추구하였다. 인상주의의 이상을 끝까지 추구했던 모네의 경우에는 화가를 쫓아 세계의 화가들이 화가 곁에 모여 살았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크고 길고 오래갔다.

이 놀라운 예술도 시작은 미미하였다. 전통적인 프랑스 살롱에서는 이 새로운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더 필요했다. 살롱 심사에서 낙선한 작품을 모았던 1863년 '낙선전(Salon des Refuses)'에서 전시된 인상주의 작품은 새롭다기보다 실력이 부족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모네나 르누아르는 그림은커녕 먹고살기도 힘든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시간에 기대어 그들이 믿는 가치를 계속 끌고 나가기에는 힘에 부쳤다. 그러나 훗날 인상주의의 스타가 되는 그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들을 다독여 준 숨은 거장 몇몇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 인상주의의 경제적 버팀목이 되었던 이가 부유한 컬렉터이자 화가였던 구스타브 카유보트다.

Gustave Caillebotte <Paris Street, Rainy Day> 1877

구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파리 거리, 비 오는 날(Paris Stree, Rainy Day)>일 것이다. 수많은 명화 파생상품을 낳은 <파리 거리, 비 오는 날>은 다양한 층위에서 볼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카유보트 그림의 특징인 독특한 구도와 치밀한 구성이 다양한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누군가는 이 그림을 보며 근대 파리의 도시 생활을 상상하고, 누군가는 정확히 드러난 2점 투시 원근법에 놀라워한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시선의 위치를 상상하고, 뿌연 공기의 색감과 질감에 경탄한다. 또한 무질서한 가운데 자신만의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을 갖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그림에서 드러나는 장소는 파리 생 라자르 역 근처의 더블린 광장이다. 이곳은 당시 관료의 도시개발 계획 아래 깔끔하고 정확하게 만들어졌다. 보도를 채운 단정한 보도블럭을 보라. 걸어 다니기에 편안할 뿐 아니라 오늘처럼 비 오는 날 빗물을 거두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멀리 보이는 건물을 보라. 같은 색감의 건물들이 튀는 곳 없이 조화롭게 광장을 채우고 있다. 비가 온 덕인지 뿌연 안개 때문에 뒤편 인물들과 건물들은 아련하게 멀어지고, 앞선 인물들에 시선이 집중된다. 그림 우측에는 딱 보아도 여유로운 부르주아 신사와 귀부인이 걸어간다.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중절모를 쓴 양복 차림이다. 법학도였으며 상속 부자였던 카유보트에게 가장 가까운 인물 유형이었을 것이다.

카유보트는 희한한 사람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면서도 여자의 생활을 섬세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가족을 그리는 데는 다정하다. 돈을 주체 못할 백만장자였으면서도 시선은 노동을 지우지 않는 사실주의에 가깝고, 그림이 검소하고 교만한 데 없이 소탈하다. 카유보트는 자신이 화가로서 드러나기보다 인상주의 친구들의 생활과 작품활동을 후원하는 데 더 열성을 가졌다. 혼자 다급하게 달리고 또 내달리기보다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손을 내밀어 함께 걸어가기를 좋아했다. 그런 성품은 화가가 남긴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Gustave Caillebotte <Le Pont de l'Europe (Tne Europe Bridge> 1876

카유보트의 그림에서는 두서 없이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딱히 갈 곳을 정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걸어간다. 그들은 홀로 제 갈 길을 가기도 하고, 둘이 함께 걸어가기도 하며, 두셋씩 엇갈려 마주치기도 한다. 가끔은 잠시 멈춰 서 먼 곳을 바라보기도 한다. 다시 한 번 <파리 거리, 비 오는 날>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세어 본다. 저 뒤에 작게 보이는 사람, 희미하게 가려진 사람까지 적어도 스물서넛은 되는 것 같다. 그림 속 사람들은 각기 제 갈 길을 간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갑남을녀 필부필부인 우리가 대개 그러하듯이.

잠시 뛰는 것 말고 끊임없이 걷는 것, 그것만큼 생을 잘 표현한 은유도 없다. 사람들은 생이라는 길 위에서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걷는다. 운동량을 계산하는 가장 흔한 기준이 '하루 만보'라는 데 그 상징성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누구와, 얼마큼 걷고 있는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걷고 있다. 혼자 걷는 순간 내게만 집중하는 기쁨을 사랑하고, 둘이 걷는 순간 나누는 온기를 사랑하고, 셋이 걷는 순간 맞춰가는 균형을 사랑하고, 넷이 걷는 순간 엮이는 연대감을 사랑한다. 다섯이나 여섯까지는 어떻게든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가 다시 홀로 걸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걸음은 계속된다. 천천히 살아 있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루 더 살아 있으며 살아가고 있다. 한 걸음 더 걷는 것만으로 충분히 '굿잡!'이다. 그러다가 구스타브 카유보트 같은 넉넉한 후원자를 만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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