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고종관기자
  • 입력 2017.05.14 10:26

 

인구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하면서 노인의 삶의 질을 높여 줄 유니버설 디자인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앤 할머니(82)는 영국의 전형적인 노인이다. 그녀는 최근 좋아하던 산책 횟수를 크게 줄였다. 염증성 골관절염을 앓고 있는 그녀는 남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옷을 입거나 신발을 신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보다 못한 남편이 작업치료사(OT:Occupational Therapist*각주 참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고령자가 옷을 입고 벗는 것을 도와주는 보조용품

작업치료사는 그녀의 동작을 테스트하고, 고령자를 위한 몇 가지 보조용구를 권유했다. 덕분에 그녀는 이제 몸을 구부리거나 팔을 젖히지 않아도 바지와 상의를 거뜬히 입을 수 있다. 또 긴 구두주걱만으로 찍찍이가 달린 신발을 혼자 신을 수 있다. 그녀는 이제 남편의 도움이 없어도 언제든지 산책을 즐긴다. 이 얘기는 노인과 장애인의 독립적 삶을 지원하는 영국의 한 자선단체에 소개된 사례다.

고령자가 급증하면서 유니버설 디자인(UD: Universal Design)을 시니어 산업에 확산하려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서구에서 1997년에 정립된 이론이다. 처음에는 장애인도 일상생활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배리어 프리 디자인(barrier free Design)의 개념에서 시작됐다. 미국의 건축가이자 산업디자이너인 로널드 메이스(Ronald Mace)는 장애인 뿐 아니라 노인이나 어린이, 심지어 정상인까지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자고 주창했다.

배리어 프리 디자인은 장애인의 특별한 요구(Special need)를 반영해 만들어진다. 그러다보면 디자인 결과물이 정상인과 장애인을 구별해 이들을 더욱 차별화시킨다. 그는 모든 사람이 편하게 이용하는 시설과 제품을 만들면 장애인을 보는 시선과 차별성도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이른바 ‘사회약자를 위한 디자인’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으로 개념을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저상버스가 대표적인 유니버설 디자인 사례로 꼽힌다. 출입구를 낮게 만들어 계단을 없앤 저상버스는 서울시가 2004년 교통약자 이용편의 증진법안에 따라 보급되기 시작했다. 2012년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교통약자를 유형별로 보면 노인이 47.3%로 가장 많다, 다음이 영유아 동반자 18.4, 장애인 11.9%, 어린이 18.6, 임산부 3.8% 순이다.

1997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 설립된 유니버설 디자인센터(Center for Universal Design)는 초기에 기능성·수용성·접근성·안전성 등 4가지 원리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8년 제1회 국제 유니버설 디자인대회를 통해 유니버설 디자인의 원리를 7가지로 발전시켰다.

①공평한 사용(누구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식)

②사용의 융통성(사용자의 기호, 능력에 따라 선택·조절할 수 있는 디자인)

③간단하고 직관적인 사용(경험이나 지식과 상관없이 쉽게 사용)

④쉽게 인지할 수 있는 정보(지각 능력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편하게 이용)

⑤오류에 대한 포용력(실수나 잘못된 작동으로 위험에 처하는 것을 방지)

⑥가벼운 물리적 노력(최소 힘으로도 작동 가능)

⑦접근성과 사용을 위한 크기와 공간(사용자의 체격이나 힘과 상관없이 작동할 수 있는 크기나 공간 제공) 등이 그것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이 각광을 받는 것은 소비력이 있는 고령자의 증가와 관련이 깊다.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1989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의 65~74세의 소비자 지출은 18%, 75세 이상에선 15% 각각 증가했다. 이는 경기침체로 이 기간 55세 미만의 지출이 감소한 것과는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령화가 일찍 진행된 미국·일본과 우리나라의 유니버설 디자인의 수준은 어떨까. 미국은 이미 1990년대에 발표된 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통칭 ADA법: 장애인도 공적인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분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의무화)이 유니버설 디자인을 확산시켰다. 심지어 OXO International사와 같은 회사는 유니버설 디자인을 기업철학으로 내세우며 글로벌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회사가 만든 굿 그립(good grip)시리즈는 악력이 약한 노인이나 장애인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OXO는 현재 1000여 제품을 디자인해 세계 30여 개국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일부 지자체와 대학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의 확산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 시범사업이나 학문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반면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은 모든 산업분야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하고 있다.

고령자를 위해 다양한 기능을 구현한 일본 병원의 웹사이트

예컨대 일본 사카이시립 메디칼 센터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자. 이 웹에서는 고령자가 이용하기 쉽도록 다양한 기능을 구현하고 있다. 사이트의 내용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을 부여하는가 하면, 활자를 키워주는 기능, 약시를 위해 바탕색을 고를 수 있는 기능 등이 그것이다.

고령자가 쉽게 옷을 입도록 디자인한 단추

옷 단추 하나로 이목을 집중시킨 그룹도 있다. 대만의 디자이너 4명(Han Jisook, Tang Wei-Hsiang, Tsai Po-An)은 노인이 옷을 입을 때 젊은 사람에 비해 단추를 끼우는 시간이 3~5배 더 든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들이 개발한 단추는 한 쪽이 얇으면서 오목한 타원형이다. 한쪽을 살짝 밀면 쉽게 버튼 홀에 끼울 수 있다. 이들이 만든 ‘Easy Button’은 2013년 RedDot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일본의 HARAC사가 만든 Casta라는 가위도 대표적인 유니버설 디자인의 한 예다. 전형적인 가위와 다른 점은 손잡이. 손가락을 넣는 원형의 삽입구 대신 넓은 패드를 사용했고, 그 사이에 스프링을 달아 물건을 자른 뒤 저절로 벌어진다. 또 칼날 부위를 플라스틱 칼집으로 덮어 사고를 예방하고 있다.

고령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고안한 가위

유니버설 디자인은 산업적인 기여와 함께 사회운동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성장의 그늘에서 소외됐던 건강불평등 계층의 존엄과 권리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의 철학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작업치료사(Occupational Therapist)는=질병이나 노화, 사고로 장애를 입은 사람이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사회에 복귀 또는 재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직업군을 말한다, 특히 노인의 경우 자립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환경 개선과 용품 사용에 대한 조언과 실무도 돕는다. 석·박사학위를 소지한 자로 미국작업요법학회에 소속돼 있다.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직업치료(NBCOT) 국가인증위원회 (National Board of Occupational Therapy)의 면허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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