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7.05.17 09:15

한 소녀가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펜을 꽉 쥐고 왼손으로는 종이를 꽉 누르고 있다. 맞닿은 두 손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소녀의 금빛 머리 위로 빛이 반짝인다. 저 멀리 보이는 창문에는 하늘하늘 빛이 움직이고 아련아련 커튼이 움직인다. 푹 숙인 고개가 손끝에 닿을 만큼 소녀는 간절하고, 온몸은 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소녀가 앉은 의자는 휘청거리는 듯 불안정하다. 빨간 테이블은 크고 넓은데도 그 위를 꽉 채울 만큼 소녀가 써 온 흔적은 적지 않다. 

이 재미있는 그림은 프랑스의 화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의 <쓰고 있는 소녀(Young Woman Writing, 1908)>다.

일상의 실내와 가정사를 주로 그려내는 앵티미슴(Intimisme)은 미술사의 유파라기보다 경향을 의미한다. 베르베르, 뷔야르, 드니, 시다네 등 앵티미슴을 대표하는 화가는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비파의 결성 멤버였던 보나르는 주제 면에서 더 눈에 띈다. 화가는 비밀스러울 만큼 개인적인 순간을 공간에 담아 펼쳐낸다. 이 그림에서 보나르가 포착한 순간 역시 지극히도 사적이다. 소녀는 혹여 누군가에게 보일까 손으로 가린 채 글을 쓰고 있다. 소녀는 무엇을 쓰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편지일 것이다. 친구에게 보낼 쪽지일까, 선생님께 드릴 카드일까. 편지는 깊이 사적인 매개체이다. 가장 진심 어린 마음을 비밀스레 담게 되기 때문이다.

Pierre Bonnard 1908

보나르의 그림은 매력적이다. 생생한 색채감 때문이다. 화가는 색을 통해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능숙했다. 이 그림에서도 붉음과 검정, 상앗빛을 아우르는 갈색빛이 화면에서 편안함을 만들어낸다. 잠시 열렬히 응집했던 인상주의는 화가의 개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발전한다. 보나르가 활동하던 시기는 보다 파격적인 시기였다. 신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를 지나 표현주의와 입체주의 등 혁신적인 실험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보나르는 모네와 함께 '최후의 인상주의자'라고 불릴 정도로 꾸준히 색채에 집착했다. 사실 그는 반인상주의에 가까운 나비파의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그렇다. 그림뿐 아니라 무대, 포스터 제작에도 열정적으로 뛰어들어 예술과 디자인의 지평을 넓혔다. 그만의 색채 감각이 디자인에 생생한 색채를 부여하고, 새로운 디자인 세계를 연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는 소녀가 편지를 쓰고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림을 보는 시선과 읽어내는 감정은 각각 다를 것이다. 소녀는 뭔가 열심히 써 왔던 종이를 몇 장이고 구겨버리고 새로운 무엇을 써 낸다. 내용도 궁금하지만 소재도 궁금하다. 피에르 보나르의 식탁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갈색빛 나는 냅킨이다. 그 시대에 펄프 냅킨을 썼을 리는 만무하지만 소녀 앞에 놓인 종잇결이라던지 팔랑팔랑하는 가벼운 무게감은 영락없는 요즘 냅킨이다. 아마 소녀는 냅킨이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간 내 손안에 들어왔던 메시지들은 꼭 편지지 위에 적혀 있지 않았다. 다양한 크기의 포스트잇, 광고지, 쿠폰, 과자 포장지 등 각양각색 위에 있었다.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의 진심을 담기 위한 것이라면, 마음을 담는 그릇은 무엇이어도 괜찮다. 그림 속 소녀는 종이를 선택했다. 마음은 현실 너머의 세계이고, 언어로 규명할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그림 속 소녀는 펜과 글씨를 선택했다. 한 장 한 장을 통과할 때마다 마음은 담기고 의미는 쌓인다.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답고 풍부한 것이 있다면 마음일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은 한 번에 담기지 않는다. 우리는 몇 번이고, 끝까지 모든 마음을 전달해야만 한다. 마지막 한 장까지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