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7.05.23 09:31

작년부터 대학가에 위치한 학원을 꾸준히 다니고 있다. 젊고 활기찬 대학가는 시대의 유행을 가장 빨리 따라간다. 닭강정집, 치킨집을 거쳐 카스테라집, 오믈렛집, 핫도그집까지 가장 핫하다는 가게들은 재빨리 대학가에 자리 잡는다. 번화하는 가게를 둘러보면 젊은이들의 최신 취향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몇 년 간 음식점이 변하는 것만 보다가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먹을거리 대신에 놀 거리의 장소가 등장했다. 그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인형뽑기방'이다. '뽀바방'이라던가 '뽑기뽑기'라는 상호명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학생들은 인형 뽑기 기계 앞에서 환성을 지르기도 하고, 양 팔 가득 인형을 안고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 백반을 사 먹을 돈으로 삼각김밥을 먹고 인형을 뽑았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거리를 지나다니며 배낭에 주렁주렁 인형을 매단 학생들을 보면 그 환성과 표정이 떠올라 자꾸 웃음이 난다.

인형뽑기방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모인다. 현대적 인간을 끝없이 괴롭히는 감정이 있다면 외로움이 아닐까. 어느덧 고전이 되어버린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표가 떠오른다. 1단계인 생리적 욕구, 배고픔이나 수면욕이 충족되면 2단계 안전의 욕구, 3단계 소속 및 애정의 욕구, 4단계 존경의 욕구를 지나 최종적으로 5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로 올라간다고 매슬로우는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리적 욕구 안에 애정의 욕구가 포함되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이 달라져 밥 굶는 사람은 드물다. 감정은 좀더 선명해졌다. 배가 고파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밥 대신 인형뽑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이다. 심지어는 등 따시고 배 불러도 외로운 사람도 많다. 외로움을 못 이기는 사람 마음이 연약하다는 걸 실감한다.

Laura Theresa Alma-Tadema

여기 수많은 인형에게 둘러싸인 한 소녀의 그림이 있다. 로라 테레사 알마-타데마(Laura Theresa Alma-Tadema, 1852~1909)의 에서도 외로움이 읽힌다. 소녀는 모든 것이 조그마한 방에 앉아 조르르 앉은 인형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이의 발치에는 인형 침대가 노란 머리의 인형을 잠재우고 있고, 레이스는 그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벽에는 교육용 삽화와 어린아이의 작품임이 역력한 그림들이 붙어 있다. 소녀에게 이 방은 비좁아 보인다. 어느새 훌쩍 자란 소녀는 과거를 기억하며 인형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고 있다. 인형 하나하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찻잔을 돌리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소녀가 이 작은 방에 들어온 이유는 외로워서가 아닐까. 잠시 기뻤던 순간에 같이 있었던 인형 같은, 손 닿는 무언가에 말을 건네고 어루만지고 싶어서가 아닐까.

화가는 로렌스 알마-타데마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예술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귀한 집 딸이었다. 당연히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과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집에 오가던 지인 중에서는 포드 매독스 브라운 같은 화가도 있었다. 생각해보라, 자연을 그대로 파고 옮기는 것을 기조로 하는 라파엘 전파의 거장과 친분이 있었다니. 미래 화가로서 완벽한 어린 시절이다. 실제 그는 로라 집안의 미술교사이기도 했다.

이미 명성있는 화가였던 로렌스 알마-타데마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매독스 브라운을 통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이루어졌다. 로렌스의 첫 번째 아내 폴린이 천연두로 사망하고 반년이 조금 지난 후였다. 한참 어른이었던 로렌스의 나이는 로라의 두 배였으나, 서른셋과 열일곱의 나이차이는 그들에게 큰 장애가 아니었다. 말이 잘 통했던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졌다. 일이 그렇게 되려고 했는지 곧이어 전쟁도 일어난다. 로렌스 알마-타데마는 보불전쟁을 피해 안전한 런던으로 이주했고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 되었다. 그림도 발전했지만 관계도 발전했다. 두 사람은 곧 미래를 약속했다. 로라의 부모는 기가 막혔다. 나이차이도 많았지만 로렌스에게는 나이가 적지 않은 딸도 둘이나 있었다. 부모는 결혼을 극구 반대했지만 확고한 두 사람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결혼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름 행복했다. 상류사회의 일원답게 결혼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화가로서도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로렌스 알마-타데마는 결국 또 외로워진다. 로라 알마-타데마는 예순을 못 채운 아쉬운 나이에 사망한다. 슬퍼하던 로렌스는 3년을 못 견디고 뒤이어 세상을 떠난다.

외로움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에게 “요즘 뭐가 제일 힘드니?”라고 물었을 때 “공부요”만큼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이 “외로워요”다. 스무 살 넘은 성인에게 같은 내용을 물었을 때 “취업이요” 다음이 “외로움이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장년은 어떠한가. 내가 직접 물어볼 기회는 없었기에 사회 현상을 엿본다. 요즘 베스트셀러에서 외로움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책이 드물다. 뉴스 기사나 댓글에서도 외로움의 문제를 읽을 수 있다. 아마 노년은 아파서 서럽고 서러워서 더 외로울 것이다. 어려도, 젊어도, 나이가 들어도 외롭다. 공부를 잘 해도 외롭고 공부를 못 해도 외롭다. 결혼을 해도 외롭고 안 해도 외롭다. 사회적으로 성공해도 외롭고 못 해도 외롭다. 그걸 다 알면서도 사람들은 외로움을 피해보려 애를 쓴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잠시 기쁨, 보람, 성취 등의 감정을 덧입히며 외로움을 잊기 위해 노력한다. 인형뽑기방의 작은 투자와 확실한 성취, 항상 곁에 두고 만질 수 있는 따뜻한 물질성은 짧은 시간을 들여 오래 외로움을 잊기에 안성맞춤이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사람들. 하루 더 따뜻하고 싶어서 작은 지폐 몇 장을 투자한다. 간절히. 너무나도 간절히 행운을 바란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