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동호기자
  • 입력 2017.09.14 13:33
<사진=KTV 영상 캡쳐>

[뉴스웍스=김동호기자] 9월14일, 오늘은 한국야구의 '레전드' 故 최동원선수가 세상을 떠난지 6년이 되는 날이다.

故 최동원 선수는 한국 프로야구사에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나홀로 4승'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등 불멸의 기록을 세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야구인생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그는 지난 1975년 경남고등학교 2학년 시절 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당시 고교 최강으로 불리우던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큰 인상을 남겼다. 그는 다음 경기에서도 선린상고를 상대로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故 최 선수는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 해외 진출의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아쉬움을 삼키기도 했다.

첫번째 기회는 197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일본 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와 입단협상이 이루어졌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1981년에는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8회까지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 등 호투를 펼치며 선전, 미국 메이저리그의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했지만 병역 문제가 걸려 빅리그 진출이 좌절되기도 했다.

그는 1983년 한국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에 입단하며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故 최 선수의 프로데뷔 2년째였던 1984년, 한국시리즈에 오른 롯데는 당시 최강팀이었던 삼성라이온즈를 최종전적 4승3패로 누르고 정상에 등극했다.

<사진=KTV 영상 캡쳐>

이 시리즈에서 최 선수는 1, 3, 5, 6, 7차전에 모두 등판하며 역투, 이 중 5차전에서만 패배했을 뿐 나머지 경기를 모두 승리로 이끌며 '최고 투수'임을 입증했다. 패한 5차전도 8이닝 완투했지만 팀은 2-3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후에도 그의 질주는 계속되었으나 1988년 선수협 파동이 일면서 그해 삼성의 간판투수 김시진과 트레이드됐다.

이것이 그의 야구인생에 전환점이 된다.

그는 트레이드 후 그의 명성에 맞지 않는 부진을 거듭하다 1991년 시즌 전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일은 '인간 최동원'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최동원은 연봉이 1억원이 넘는 선수로 개인적으로는 선수협이라는 제도 자체가 필요치 않은 선수였다. 하지만 1988년 해태 타이거즈의 김대현 선수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선수 복지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는 선수협 결성과 관련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본인 개인의 욕심이 아닌 후배 동료들을 위한 희생정신을 발휘한 모습을 볼때 그의 인성을 옅볼수 있다.

하지만 은퇴 후에도 그의 야구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지도자로 그라운드에 서고 싶었지만 불러주는 구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2001년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로 그라운드에 복귀, 2007년 한화 2군 감독을 거쳐 2008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끝내 그가 그렇게도 입고 싶었던 롯데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고 지도자 생활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화 2군감독 시절이던 2007년 대장암을 진단 받고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 2011년 9월14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는 최동원 선수 시절 등번호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사진=KBS N sports 영상캡쳐>

그는 선수생활 8시즌 동안 248게임에 출전, 1414.2이닝을 투구하며 103승 74패 방어율 2.46을 기록했다.

한편, 롯데 자이언츠는 이날 사직야구장에서 故 최동원 6주기 추모행사를 가지며, 선수들 모두 이날 경기에서 '11번 최동원'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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