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2.07 15:56

"막후의 책략가 저우언라이"

이 서리는 고위급 관료에게 붙일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우리식의 ‘아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직급의 사람을 고위 관료의 이름이나 직함과 병렬해서 붙일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직능을 이야기하자면 상황은 달라진다. 자신이 모시는 상관을 위해 책략을 꾸미고, 자금줄을 관리하며, 대외 교섭을 주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중국식 아전, 즉 ‘사야’의 기능을 두고 볼 때 그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사오싱을 조상의 고향으로 두고 태어나 사회주의 중국의 초대 총리를 맡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다. 저우언라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중국 건국의 영웅 마오쩌둥(毛澤東)을 옆에서 보필하며 장대한 꿈을 이룬 인물이다. 

그는 대신 ‘만년 2인자’였다. ‘주군(主君)’에 해당하는 마오쩌둥의 권좌에는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건국과 그 뒤에 벌어진 혹심한 정치적 풍파를 모두 겪은 인물이다. 마오쩌둥과 함께 걸어온 건국 전의 혁명 과정은 한국의 일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건국 뒤 그는 마오쩌둥이 과격한 사회주의 실험을 실행할 때에도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사회주의 중국을 건국한 주역 마오쩌둥(왼쪽)과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는 저장의 책사, ‘사야’의 전통을 잇는 대표적 인물로 손꼽을 수 있다.

아울러 늘 총리 자리를 유지하면서 문화대혁명의 시련기를 거친 뒤 중국의 대미 수교와 그에 필요한 각종 교섭, 문혁 뒤의 혼란 상황 등을 모두 관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에게 늘 따르는 이미지는 치밀한 전략, 피바람 부는 권력 투쟁에서도 허점을 드러내지 않는 용의주도(用意周到)함, 마오쩌둥의 초법적인 권력에 자칫 생명을 꺾을 수도 있었던 요인(要人)들에 대한 세밀한 배려 등으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미국과의 교섭에서 큰 능력을 발휘했다. 옛 소련이 버티고 있던 냉전 시절의 국면을 관리하면서 헨리 키신저 당시 미 국무장관과 막후에서 숨 막히는 교섭을 벌여 결국 냉전시대의 틀을 벗어 버리고 미국과의 수교를 성사시킨 공로자다. 아울러 제3세계 비(非)동맹 외교의 축을 형성해 건국 뒤의 중국을 국제무대의 중요한 변수로 올려놓은 과정에서도 그의 수완은 빛을 발했다. 

마오쩌둥의 거칠고 강한 전략의 토대가 저우언라이의 노련하면서도 세련된 추진능력과 결합해 중국 공산당으로 하여금 힘의 절대적 우위에 있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과의 10년에 걸친 내전 끝에 막판 뒤집기에 성공토록 했다는 점도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저우언라이에게는 늘 막후의 교섭자, 막후의 전략가라는 별칭이 붙어 다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우언라이는 사오싱의 가장 뚜렷한 전통인 ‘사야’의 맥을 제대로 이었던 사람이다. 세밀한 관리가 가능하며, 어려운 행정의 계통을 잡는 데 특출하며, 아울러 책략의 깊은 전통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처신(處身)에 있어서도 치밀한 사고와 사려 깊은 언행으로 험난한 정치적 풍파를 뚫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초기 경제학자이자 인구학의 개념을 정책 분야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마인추(馬寅初 1882~1982)도 이 사오싱 출신이다. 그는 인구학 분야에서의 탁월한 안목으로 중국의 건국 뒤 경제발전에 인구학 이론을 처음 제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1992년 이후 중국의 금융을 이끌어 온 쩡페이옌(曾培炎) 부총리도 이곳 사오싱 출신이다. 

그는 무려 15년 넘게 중국의 재정과 금융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장쩌민(江澤民)의 이른바 ‘상하이방(上海幇)’ 일원으로 그의 집권 기간 내내 재정과 금융 업무를 이끌었고, 아울러 중국의 장기적인 발전계획 수립과 집행을 맡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저우언라이에 비해 훨씬 전에 태어나 활동했던 사오싱 출신의 인물 중에도 우리가 꼽을 만한 사람이 아주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무래도 중국 최고의 명필인 왕희지(王羲之)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 중원지역에서 서진의 왕실을 따라 남으로 내려온 가문의 일원인 왕희지는 사오싱에 살면서 유명한 ‘난정집서(蘭亭集序)’를 남긴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그 글씨를 너무 흠모한 나머지 자신의 무덤에 부장(副葬)토록 했다는 작품 말이다. 요즘도 사오싱을 방문한 사람들은 왕희지가 친구들과 함께 시를 읊고 글을 남겼다는 난정(蘭亭)의 유적지를 구경할 수 있다.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인물이 서시(西施)다. 중국의 4대 미녀, 혹은 중국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사람이다. 사오싱에서 조금 떨어진 주지(諸曁)에서 태어난 뒤 오(吳)나라에 끌려가 그 유명한 범려(范蠡)와 함께 조국인 월(越)나라를 위해 고도의 모략을 펼친 인물이다. 중국 지혜의 대명사로 꼽히는 범려와 함께 탁월한 전략으로 이웃 오(吳)나라 부차(夫差) 정권을 꺾는 데 크게 활약한 여성이다. 

그 월나라의 본거지 또한 사오싱이다. 따라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노력으로 오나라의 부차에게 끝까지 저항해 마침내 나라 빼앗긴 설움을 설욕했다는 월나라 임금 구천(勾踐)의 고향 또는 본거지가 사오싱이다. 범려와 함께 활동하면서 토사구팽(兎死狗烹), 조진궁장(鳥盡弓藏)의 성어를 남긴 주인공이다. 

특기할 사람이 또 있다. 앞에서 잠시 소개한 사안(謝安)이다. 그는 8만의 군사로 100만에 달했다는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군대를 물리친 전략가로 유명하다. 원래는 서진 명망가의 자제로 문학 등에서 재주가 뛰어났으며, 명필 왕희지와의 교분으로도 이름이 나 있다. 정치적으로 어려웠다가 결국 그를 딛고 재기에 성공했다는 의미의 ‘동산재기(東山再起)’라는 성어로도 유명하다. 우리말 쓰임새에서 ‘실패로부터 재기(再起)했다’는 식의 표현은 이로부터 유래했다고 봐도 좋다. 

전진과의 전쟁에 앞서 동진 왕실을 전복하려는 환온이라는 권세가의 쿠데타 음모를 제압하고, 이어서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막강한 병력의 전진 왕실 부견의 침략 야욕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그는 매우 출중한 정치가, 나아가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에 해당한다. 

위에서 소개한 인물 중 명필 왕희지를 제외한다면 대개가 다 전략과 정략, 수리(數理)적 능력에 매우 뛰어난 면모를 보인 사람들이다. 저우언라이의 전략적 안목은 중국에서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다. 뛰어난 교섭 능력 또한 마찬가지다. 일의 전체적인 맥락을 잘 잡아 쓸 데 없이 힘을 분산시키지 않으면서 제 목표를 이뤄가는 스타일의 사람이다.

중국 사대 미녀의 한 사람 서시. 저장 주지라는 지역 출신이다. 범려와 함께 오나라 임금 부차에 맞서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오월동주’, ‘와신상담’의 숱한 스토리를 낳은 오나라와 월나라의 싸움에서 희대의 책략가로 활동했던 범려의 초상.

그런 저우언라이의 스타일은 사오싱이 전통적으로 많이 배출한 책략가 그룹 ‘사야’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치밀한 계산과 신중한 행동, 유연한 사고력과 착실한 집행력 등을 두루 갖춘 그런 책략가와 실무 행정가의 면모 말이다. 

범려의 책략을 충분히 인지한 뒤 그를 따라 오나라에 침입해 미인계로써 오나라 임금 부차를 패망으로 이끌어간 서시, 8만의 병사로 100만의 전진 부견의 군대를 꺾은 탁월한 군사 전략가 사안, 장쩌민의 경제 좌장으로서 중국의 금융과 재정을 오래 이끌었던 쩡페이옌 등의 면면이 다 그렇다.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 책밭, 유광종 저(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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