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동호기자
  • 입력 2018.01.09 11:04

"툭 하면 기자 잡아다 조사하던 시절 솔직히 불안했다"

<사진=시사오늘 제공>

[뉴스웍스=김동호기자] 지난 1987년 6.10 민주화항쟁의 시발점이 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주제로한 영화 ‘1987’이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당시 이를 최초 보도한 신성호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전 중앙일보 기자)의 증언이 나와 주목된다.

신 교수는 9일 보도된 시사주간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스무살 갓 넘은 젊은 대학생이 조사를 받다가 쇼크사 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80 먹은 노인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신 교수는 "해당 기사는 최초 사회면 2단짜리에 불과했다”면서 “그런데 그날 오후 3시 넘어서 부터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언론사의 전화기가 빗발쳤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기사가 나간 후 선배 기자들에게 “오늘 저녁에 집에 가지마라. 안기부에서 잡혀 갈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들었다"면서 “결국 집에 못 들어가고 회사 근처의 여관에서 잠을 잤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당시는 툭 하면 기자를 잡아다 조사하던 시절이었다"고 당시의 불안했던 심경을 전했다.

이어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커서 '아버지, 기자 할 때 뭐하셨어요?'라고 물어본다면 또 후배기자들이 훗날 '선배는 어떤 기사를 썼어요?'하고 물어본다면 그 때 부끄럽지 않은 아빠,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자신감이 샘 솟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해당 보도에 대해 “이 사건 보도는 하나의 ‘격발 장치’였다.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분명히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의 강압정치로 표출을 못하고 시민들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면서 “그러다 안에서 곪은 것이 이 사건을 계기로 겉으로 표출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987년 당시는 12대 총선(1985년)을 통해 여소야대는 아니지만 당시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며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종철 군의 죽음은 국민들의 분노에 더욱 불을 붙였다.

대학생들의 시위를 보면 ‘빨갱이’라고 부르던 시민들조차 거리로 뛰어 나왔고 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시위에 동참하면서 정권에 대한 분노는 전국을 뒤덮었다.

이를 못 이긴 전두환 정권은 결국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였고 군사정권의 종식을 불러오는 계기가 됐다.

신 교수는 이후 등장한 노태우 정권에 대해서는 “만약 전두환에서 바로 YS로 갔다면 문민대통령으로써 하나회를 완벽히 척결할 수 있었겠나. 노태우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서 군사정권을 씻어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절묘한 수순’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신 교수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개헌과 관련해 “개인적 생각으로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된 시스템을 고치는 것은 필요하다”면서 "시대가 바뀌었으니 당연히 지금 시대에 맞게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그러면서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6월 항쟁 이후 노태우부터 박근혜까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다들 불행했다.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됐기 때문이다”라며 “권력이 집중된 5년 단임제라는 것이 그렇게 만들었다. 대통령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 뭐가 됐던 간에 현행 헌법의 구조는 좀 바꿔야 되지 않겠나”고 말했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