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고종관기자
  • 입력 2018.03.26 17:59

[뉴스웍스=고종관기자] 서울성모병원이 고령 환자를 위한 ‘수술전 협진실’을 선보였다. 일견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실은 병원 경영의 새로운 트렌드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병원측은 수술전 협진실이 원내 ‘서비스 디자인 개선활동'으로 제안된 내용이라고 했다. 노인환자의 시각에서 공간과 인적자원을 재배치해 불편함을 최대한 덜어주자는 것이다.

국내 병원에도 몇 년 전부터 서비스디자인 바람이 불고 있다. 서비스디자인은 사용자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시설 이용자의 경험을 관찰·분석해 불편한 시스템을 바꿔주는 것이다.

이미 많은 병원에서 시도를 하고 있고, 일부 병원에선 정착단계다. 서울의료원의 ‘시민공감 서비스디자인센터’, 명지병원의 '환자공감센터'와 '케어서비스디자인센터’, 서울아산병원의 ‘이노베이션디자인센터’ 등이 그것이다.

수술실에 디자인의 개념을 적용한 ‘수술 전 불안감 감소 프로젝트’(서울아산병원) 사례를 보자. 이곳에선 수술대기실에 개인부스를 마련해 환자의 불안감을 최소화한다. 대기실에 환자의 침대가 진입하면 자동으로 조명이 켜지고, 타이머는 대기시간을 예고한다. 침대도 사선으로 배치했다. 환자의 상태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의료진의 동선을 바꿨다.

서비스디자인의 핵심은 고객(환자)의 관점이다. 관점은 경험에서 나온다. 환자가 병원을 이용하면서 부닥치는 모든 프로세스, 그리고 환자 접점에 있는 의료진과 관리직 모두가 여기에 포함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용어가 ‘환자 여행(The Patient Journey)’이다. 환자가 병원을 여행하듯 프로세스를 따라 이동하면서 느끼는 체험 모두가 디자인 개선의 소재가 된다.

병원은 이를 통해 두 가지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하나는 고객이 만족하는 병원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환자의 경험을 통해 프로세스를 개선하면 환자의 회복속도가 빨라지고, 건강이 향상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러한 병원의 노력은 곧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다른 이점은 낭비와 비효율을 찾아 제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객경험의 개선은 토요타의 '린(lean)시스템'과 유사하다. 린 원칙은 다른 말로 ‘Just In Time(JIT)’과 같은 개념이다. 필요한 물건을, 적기에, 시장의 요구만큼만 생산하는 것이다. 결국 생산에 들어가는 자원을 절약하고, 비효율적인 요소를 제거하므로써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결국 환자의 관점에서 여행을 재구성하면 치료의 질이 향상되고, 의료자원의 낭비를 막는 것이다.

영국 국립보건서비스(NHS)는 환자 경험을 향상시키기 위해 ‘Experience Based Co-Design(EBCD)을 공식화했고, 미국, 유럽, 호주 등 선진의료에서 이를 적극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간단치 않다.

우선 환자의 경험을 포착해야 한다. 설문조사 또는 인터뷰를 통해 정보를 얻어야 한다.

다음은 환자의 감정을 이해하고 확인한다. 환자의 모든 접점을 찾아 환자의 감정을 매핑한다. 특히 환자의 긍정 또는 부정적인 경험이 서비스 제공자와 수요자(환자 또는 보호자)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음은 문제 해결이다. 계획을 수립하는 데는 서비스 제공자가 모두 참여해야 한다.

빈 벽이 있는 넓은 공간에 환자의 동선을 그린 지도를 그리고, 환자의 감정이나 접점의 문제점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프로세스 맵을 만들어 간다.

대표적 사례로 환자의 대기시간을 개선하기 위한 프로세스 맵을 보자. 환자는 퇴원까지 몇 단계를 거치는지, 병목현상은 어디인지, 대기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가장 대기시간이 길었던 곳은 어딘지, 환자의 감정은 어떠했는지, 직원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등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무수히 나올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환자 흐름에 대한 분석도구(Flow Analysis Tool: FAT)’를 이용해 전체의 서비스 조감도가 나올 것이다.

이 도구는 기업의 제품 생산과정과 다르지 않다. 한 눈에 환자의 흐름을 이해함으로써 대기 또는 지연 상황을 쉽게 조망할 수 있다.

이처럼 환자경험을 바탕으로 서비스 디자인을 새로 짜는 것은 전사적인 참여와 노력 없이는 공염불일 수 있다. 또 여기에는 무형의 서비스 개선 뿐 아니라 시설이나 장비의 보완도 필요하다. 어쨌든 병원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이 같은 서비스의 진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정부가 이런 환자경험 이론을 도입해 병원을 평가하겠다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7월 시작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환자경험 평가’가 그것이다. 환자들을 설문조사해 병원 방문에서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의료의 수준을 측정·평가한다고 한다. 국내 의료의 적정성 평가가 그동안 임상에 그쳐 의료의 질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심평원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심평원의 환자경험 평가는 어떻게 할까. 심평원 자료에 따르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성인 환자를 대상으로 24개 항목의 경험 인식을 질문하는 식이다. 평가 영역은 크게 영역별 환자경험, 전반적 평가, 개인 특성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영역별 환자경험은 간호사 서비스(4문항), 의사서비스(4문항), 투약 및 치료과정(5문항), 병원환경(2문항), 환자권리보장(4문항)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몇 항목의 질문으로 환자의 경험을 파악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각 항목에 대한 신뢰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환자의 경험 포착을 위해 몇 시간에 걸친 인터뷰는 물론 감정까지도 기록하고, 심지어 사진이나 동영상까지 동원해 만드는 프로세스 맵을 몇 항목의 설문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이미 국내의 많은 병원이 이보다 훨씬 진보적인 방식으로 서비스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는 고객을 붙잡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의료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서비스디자인을 국내에 확산시키기 위해선 평가보다 병원의 이 같은 자구노력을 응원하고 지원해주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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