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윤주진기자
  • 입력 2015.12.15 06:00

- 해고는 무조건 ‘징계’여야 하는 현행법, 기업에 부담
- 저성과자 해고 어려우면 결국 정규직 채용이 위축될 수밖에 없어

2012년 2월 19일 스페인 전역에서 100만 명의 노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주도하는 노동개혁법안에 반대하는 이들이었다. 전체 인구의 25%, 청년 2명 중 1명이 실업자로 PIIGS 국가 중 하나로 불렸던 스페인에게 노동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노조 측은 계속해서 시위와 파업을 이어갔지만 진통 끝에 국회는 노동개혁 법안을 처리했다. 

개혁의 내용은 이른바 ‘쉬운 해고’였다. 해고요건을 완화하고 기업이 해고에 따라 부담해야 할 비용도 대폭 줄여줬다. 그렇게 도입된 쉬운 해고는 결과적으로 ‘쉬운 고용’을 가져다줬다. 3%대의 경제성장률, 르노·폭스바겐 등 주요 기업들의 연이은 투자, 실업자 100만명 감소 등으로 3년 후인 2015년 스페인의 경제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개혁 움직임이 있다. 지난 9월 노사정위원회는 대타협을 통해 저성과자에 대한 일반해고제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추후 노사정위의 협의는 중단된 상태며 더 이상 논의의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 저성과자 해고, 규정조차도 미비한 상황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측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경우 해고를 할 수 없다. 법규를 위반하거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 징계해고를, 기업의 경영이 나빠진 경우에는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 

반면 저(低)성과자나 업무 부적응자, 태도가 불량한 직원 등에 대한 일반해고 규정은 없는 상태다. 규정이 미비하다보니 연간 약 1만3000건에 달하는 해고 관련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저성과자에 대한 해고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업무성과가 현저히 낮고 본인이 개선할 의지가 없는 경우 법원은 해고의 정당성을 인정한 바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이 말하는 해고의 ‘정당한 이유’라는 것에 대한 객관적 판단 기준이 미비하고 법원이 주로 근로자를 보호하는 관점에서 법규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 현실적으로 저성과자 해고는 매우 어렵다. 

◆ 지나치게 어렵고 까다로운 저성과자 해고

예컨대 지난 2004년 서울행정법원은 모 증권회사에 다니는 A직원이 2년간 총 160여 회에 걸쳐 회사 자금을 사적으로 쓰고 내부 인사평가에서 최하위 등급을 받은 직원에 대한 해고를 부당하다고 판결한 바 있다. 그 이유는 회사의 인사평가 규정이 불합리하다는 것이었다. 

임원에 대한 해고마저도 부당해고라는 판결도 나왔다. SI사업 수주를 위해 상무로 영입된 B씨는 2개월간 저조한 영업실적을 보였고 사측은 근로계약 취소를 통보했다. 법원은 대우는 임원급이지만 사실상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된다며 부당해고에 해당된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정당한 해고로 인정받기 위해서 충족해야 할 기준도 지나치게 복잡하고 까다롭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성과 향상을 위한 교육 등의 절차에 대한 근거조항이 존재할 것 ▲대상자 선정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이루어질 것(저성과의 상당기간 지속, 주체를 달리하는 2회 이상 심사) ▲개선프로그램은 충분한 기간 동안 이루어질 것 ▲교육과제가 적정하고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 ▲개선 과정에서도 지속적인 협의가 있을 것 ▲직무 변경 등에 대한 당사자의 요청이 있으면 반영해 줄 것 등을 만족시켜야만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시하고 있다. 한편 역량향상을 위한 교육을 도입하는 것 자체를 노조가 반대하고 있어 사측은 난감한 것이 현실이다. 

◆ 어려운 일반해고, 정규직 채용 위축으로 이어져

기업 내 저성과자로 인한 부정적 효과는 예상보다 심각하다. 실제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대기업의 66.7%, 중소기업의 45.8%가 저성과자로 인해 내부 분위기가 저해되고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근로자의 동의 없이 근로조건에 불이익을 가할 수 없는 현행법상 기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은 정규직 채용에 소극적이다. 규정이 미비할 뿐만 아니라 일관된 판단기준과 지침조차 없는 상황에서 ‘사람 하나 잘못 뽑으면 평생 고생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한 정규직 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1~2년 근무기간만으로는 근로자의 역량과 기대성과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비정규직이나 인턴 근무 후 정규직 전환도 녹록치 않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비정규직 선호 현상이 두드러지고 정규직 채용 시 스펙을 과도하게 보는 경향성도 생긴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김희성 강원대학교 교수는 “우리나라의 해고제도는 역량이 있는 청년이 정규사원이 될 수 없고 성과가 낮은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계속 고용되는 불공평한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입법보완 반드시 필요...해고 유연성도 높여야

이와 같은 현실을 고려해 전문가들은 법적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근로기준법상 징계해고와 구분되는 통상해고 개념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이미 기존에 나온 수많은 판례들을 기초로 저성과자에 대한 합당한 해고의 절차와 범위를 마련할 수 있어 규정의 신설이 어렵지 않은 상황이다. 규정이 신설될 경우 시행령이나 정부 가이드라인 등을 통해 일반해고를 둘러싼 법적 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변경해고제도 역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현행법상으로는 사용자가 문제를 드러낸 근로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더 불리한 직위나 근무조건을 제시할 수 없게 돼 있어 사용자 입장에서는 해고 외에는 별다른 방안을 찾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 같은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사용자가 근로자의 동의 없이 근로관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근로조건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을 주도록 하자는 것이 바로 변경해고제도의 취지다. 

한편 미국이나 영국, 독일과 같이 우리 역시 해고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보다 유연성을 높일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해고자유의 원칙’에 따라 특별한 제한 없이 얼마든지 해고가 가능하다. 영국은 근로자의 지식, 자질, 육체적·정신적 상태 등 업무수행능력 결여 또는 사용자가 근로자의 근무성과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 해고 가능하게 돼있다. 고용보호 정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독일마저도 대부분의 판례에서 저성과자에 대한 해고의 정당성을 인정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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