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윤주진기자
  • 입력 2015.12.16 10:30

이번 달로 1년 9개월째 임원 비서로 근무 중인 A씨는 고민이 날로 깊어가고 있다. 3개월 후면 계약이 끝나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긴 하지만 급여나 근무조건, 복지혜택 등이 만족스러운 A씨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2년 더 근무하고 싶고, 회사 입장에서도 업무능력이 탁월한 A씨를 더 오랫동안 고용하고 싶다. 하지만 현행법상 A씨를 더 고용하려면 정규직 전환이라는 부담을 안아야 한다. 임원의 숫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서 비서업무에 특화한 A씨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진 : 드라마 <미생> 캡쳐

한편 B씨는 호주에서 6개월간의 근로계약이 끝난 뒤 파격적인 제안을 받았다. 회사 대표가 이른바 ‘영주권 스폰서’가 되어주겠다는 것이다. 사실상 정규직으로 채용해 좀 더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제안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계약직 근로자지만 B씨는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성실하게 근무해 그 능력을 인정받았고 결국 기한 없는 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B씨가 다니는 회사의 기존 직원들도 모두 비슷한 과정을 통해 채용됐다. 

A씨와 B씨 모두 비정규직으로 출발해 회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처한 현실은 판이하게 다르다. 강제적 규정으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함으로써 기업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 한국에서는 더 이상 A씨가 고용되기 어려운 반면, 비정규직으로도 얼마든지 재계약할 수 있는 호주에서는 B씨를 사실상 정규직으로 채용하고자 한 것이다. 무엇이 이 둘의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 2년 뒤 정규직 전환? 현실은 ‘글쎄’

2006년 말 재계와 노동계로부터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2년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차별을 해소하고,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으로 제한해 그 후 계약을 갱신하려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이었다. 

하지만 그 후 현실에서는 정규직 전환이 오히려 감소했다. 양창영 새누리당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2년 27.9%였던 비정규직 근로자(1년6개월 이상 근속)의 정규직 전환율은 2013년 25.6%, 지난해 20.6%로 하락했다. 한편 비정규직 근로자의 계약 종료율은 2012년 51.7%, 2013년 53.3%, 2014년 58.6%로 높아졌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2년간 기간제법 적용 임금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율은 평균 15.1%였다. 

이 같이 입법의도와 현실이 전혀 다른 현상을 두고 실제 고용주인 기업들로부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고용과 관련된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줄 것이라는 기대는 무리였다는 것이다. 

◆ 정규직 채용의 부담...비정규직 선호로 이어져

기업이 무조건 비정규직만을 선호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해에 불과하다. 실제 기업에게는 충성도가 높고 안정적인 노동을 제공해줄 수 있는 근로자가 필요하다. 높은 임금을 받은 노동자가 더 좋은 성과를 낸다는 ‘효율성 임금 이론’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 전문세탁업체 A사에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30~50대 주부 근로자들이 정규직으로 바뀐 뒤 높은 생산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의 정규직 보호 수준 국제비교 (자료 : 한국경제연구원)

문제는 정규직 채용이 비단 ‘임금’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규직에 대한 각종 고용보호법제는 기업의 정규직 채용을 위축시킨다. 한국의 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개별 해고는 OECD 국가 중 8위 수준으로 임의적인 해고가 매우 어려우며, 부당해고로 드러날 경우 무조건 복직이 보장되는 3개 국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고용조정비용은 세계경제포럼(WEF) 기준으로 144개국 중 22위로 칠레, 중국, 예멘과 유사한 수준이며 OECD 국가 중에서는 2위다. 퇴직금만을 높고 봤을 때 해고비용은 OECD 5위에 속한다. 

이처럼 정규직에 대한 고용보호 수준이 강한 편인 국내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정규직 전환은 비단 임금의 문제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 비정규직 규제도 까다로운 편

한편 비정규직에 대한 사용 규제 역시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다소 까다로운 편에 속한다. 

미국과 캐나다, 호주, 스위스,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등은 기간제 근로자에 대한 사용사유 및 기간 제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덴마크나 핀란드, 멕시코, 노르웨이, 뉴질랜드, 스웨덴은 객관적 사유가 있어야 한다는 단서가 있으나 계약기간 및 갱신 횟수에는 별도의 제한이 없다. 

일본이나 독일, 벨기에, 체코 등은 한국과 비슷하게 사유에는 제한이 없으나 기간에는 제한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3년까지 비정규직을 고용할 수 있으며 전문직이나 60세 이상은 5년까지 가능하다. 독일은 원칙적으로 2년까지 허용하고 있으나 객관적 사유가 있으면 무기한 사용이 가능하며 아일랜드는 최대 4년까지 계약이 가능하다. 네덜란드는 3년, 포르투갈은 6년까지도 가능하다. 현행법상 2년 제한이 다소 과도한 편이다. 

◆ 근본적 해결책은 ‘정규직 과보호’ 철폐를 통한 차별 해소

한편 정부와 여당은 노동개혁 5대입법 과제 중 하나로 35세 이상 근로자가 희망할 경우 비정규직 계약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기간제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2년간 근무한 뒤 직장을 옮겨야 하는 애로사항을 해소하자는 취지로 정부는 이를 ‘비정규직 고용 안정법’이라 부르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고용노동부가 지난 10월 15~30일 전국 기간제 근로자 247명과 기간제 다수 고용 사업주·인사담당자 302명을 만나 의견을 모은 ‘기간제·파견 당사가 현장 간담회 결과’를 보면, 대부분의 근로자가 4년 연장안에 찬성하는 입장이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전문가들은 이 같은 비정규직 근로기간 연장이 결코 근본적 해답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OECD 역시 “한국은 정규직에 대한 고용보호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비정규직 근로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교수는 “정규직으로의 진입장벽이 높은 상황에서 비정규직 기간 연장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가 철폐되지 않으면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은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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