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수정 기자
  • 입력 2018.05.18 07:18
<사진=5·18기념재단>

[뉴스웍스=이수정 기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간, 전라남도 광주 시민이 전두환 군부세력에 맞서 '비상계엄 철폐'와 '유신세력 척결'을 외친 사건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시해되며 길었던 박정희 독재체제가 무너진 후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꿈꾸지만 불안한 정국을 틈타 신군부 세력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제2군사쿠데타인 12·12사태를 일으킨다. 

순식간에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령을 다시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군사통치 세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1980년 5월 15일 전국 학생 연대는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고, 신군부는 이를 이유로 17일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를 의결했다. 

비상 계엄군은 전라남도 광주의 대학을 장악하고 등교를 저지했는데, 이에 반발한 전남대학교 학생들과 비상계엄군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학생들이 '계엄철폐'와 '휴교령 철폐'를 외치며 광주 중심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한 게 5·18광주민주화 운동의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은 학생 시위대를 지지하는 일반 시민들도 구타하고 체포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다음날인 19일 금남로에 모여들어 계엄군과 공방전을 펼쳤다. 하지만 시민을 보호해야 할 계엄군은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해 무차별적인 발포를 진행했다.

<사진=5·18기념재단>

당시 전두환 정권은 언론을 장악하고 검열해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진압 중이며, 민간인의 피해는 없다"는 거짓 보도를 낸다. 계엄군은 광주 외곽을 둘러싸고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통행까지 막았다. 21일에는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도 차단됐다. 그 시절 광주는 정부에 의해 철저히 통제 당했다.

그 사이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나가는 시민들의 시체가 뒹굴었다. 계엄군은 저항하다 총에 맞은 시민들을 후송하려는 사람에게도 총을 난사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시민군을 만든다.

또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5월 21~26일까지 7일동안 '시민 자체제'를 수립해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린 광주 시민은 계엄군 대표와 만나 협의를 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청을 사수하려는 시민군들의 목소리였다. 이날도 많은 시민들과 시민군이 총격에 희생 당했다. "5월의 광주는 제사없는 집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 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씨앗을 심은 사건이었다. 이런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1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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