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경보기자
  • 입력 2018.05.20 12:38
구본무 회장이 지난 2011년 1월 글로벌CEO전략회의에서 최고경영진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제공=LG> 

[뉴스웍스=박경보기자] 20일 세상을 떠난 구본무 회장은 1945년 2월 10일 경남 진주에서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장남인 구자경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삼선고등학교를 거쳐 1964년 연세대학교 상경대에 입학했지만 졸업을 하지 않고 미국 애슐랜드대학교로 학적을 옮겼다. 1972년 애슐랜드대에서 경영학 학사를 받고 1974년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1975년 LG화학 심사과 부장으로 입사해 경영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1981년 LG전자 이사, 1984년 LG전자 일본 동경주재 상무 등을 거쳐 1989년 그룹 부회장에 오른 뒤 1995년 구자경 명예회장이 은퇴하면서 LG그룹 3대 회장에 취임했다.

구 회장이 총수로 있던 지난 23년간 LG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등 격랑의 시기를 거쳤다.

힘든 시기일수록 구 회장의 위기관리능력은 더욱 빛났다. 특유의 뚝심과 끈기를 앞세운 정도(正道)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글로벌 LG’의 초석을 다졌기 때문이다.

구 회장의 경영능력은 숫자로 나타난 경영실적으로 입증된다. 구 회장은 지난 1995년 LG그룹 회장에 올라 지난 23년 동안 LG의 매출은 30조원(1994년)에서 2017년 160조원으로 5배 이상 키웠다. 특히 해외 매출은 약 10조원에서 110조원으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디스플레이와 2차전지 사업을 세계 1위로 키워낸 것도 돋보인다. 이같은 성장의 비결에는 구 회장의 특유의 끈기와 결단의 리더십이 뒷받침됐다.

구 회장의 능력은 위기일 때 더욱 빛났다. 외환위기 때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핵심역량이 될 업종에 집중하고, 대기업 최초 지주회사 전환으로 선진적인 지배구조 시스템을 구축했다. 특히 1998년 말 정부가 주도한 빅딜 논의로 반도체 사업 유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당시 LG전자와 LG반도체가 각각 영위하던 LCD 사업을 따로 분리해 ‘LG LCD’를 설립한 것은 구 회장의 과감한 결단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로 평가된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실적이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도 구 회장의 과감한 선택과 집중이 뒷받침됐다. 2005년 ‘LG웨이(Way)’를 선언하며 전자·화학·통신 중심의 글로벌 리딩 기업으로 재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 디딤돌이 된 것이다.

투명경영에도 앞장섰다. 구 회장은 “어려울수록 투명한 것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정도(正道) 경영철학을 실천에 옮긴 대표적인 경영자다.

미래 준비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미래성장사업의 성패는 R&D(연구개발)에서 판가름난다는 신념 아래 디스플레이, 2차전지, LTE 등에 대대적 투자를 단행했다. 나아가 강서구 마곡산업단지에 4조원을 투자해 국내 최대규모의 융복합 연구단지인 ‘LG사이언스파크’ 건립을 결정했다.

그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과감한 판단은 현재의 LG를 만들었고 미래의 LG를 향한 초석이 됐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73세의 아쉬운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난 그를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