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2.21 10:37
고대 전쟁에서의 전략 무기인 말을 판별하는 일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 백락이라는 인물은 말의 능력을 알아보는 능력으로서는 최고 천재였다. 백락이 말의 능력을 알아보는 내용의 '백락상마도'. 중국 그림이다.

험준한 태항산(太行山)을 늙은 말이 오르고 있었다. 소금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끌면서 말이다. 다리는 자꾸 접혔으며 말굽은 헤어지고, 땀은 흥건하게 몸을 적셨다. 그래도 말은 높고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끙끙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백락(伯樂)이 그 말을 알아봤다. 말은 하루에 천리를 내닫는 명마, 즉 驥(기)였다. 명마를 알아보는 데 일가견이 있던 백락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던 것. 그러나 백락은 그저 타고 지나가던 제 수레에서 내려 천리마의 멍에를 잠시 벗겨주는 일밖에는 달리 해 줄 게 없었다.

그래도 그것이 고마웠던가. 천리마는 소금 수레의 멍에를 벗겨주자 아주 높은 소리로 울었다고 했다. 그 소리는 깊고 험한 태항산의 골짜기에, 그리고 하늘 끝에까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천리마의 비참한 운명을 목격한 백락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천리마의 이야기다. 타고 난 명줄은 천리마, 그러나 생활에서는 소금수레를 끄는 짐말이었다.

이 경우를 ‘鹽車(염거)’ 또는 ‘驥服鹽車(기복염거)’라고 적는다. 한자세계에서는 어엿한 전고(典故)로 자리를 잡은 말이다. 천리마(驥)가 소금수레(鹽車)를 끈다(服)는 엮음이다. 이런 상황이 바로 불우(不遇)다. 이 단어 ‘불우’는 만나지(遇) 못하다(不)의 구성이다. 이 천리마는 자신이 명마임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셈이다. 백락을 일찌감치 만났다면 운명이 달라졌을 것을….

최근 한 지인이 문자를 보내면서 “세상을 못 만난 불우한 처지”라며 제 심경을 표현했다. 懷才不遇(회재불우)인 셈이다. 재주(才)를 품고서도(懷)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다(不遇)는 뜻이다. 큰 재주 품은 사람을 아주 작게 쓰는 大才小用(대재소용)도 마찬가지 의미다.

주변에 그런 사람 적지 않다. 더 높은 자리에서 더 큰 일을 할 사람이 세상을 만나지 못해 형편없이 구겨진 채 살아가는 경우를 많이 본다. 태어난 가정에서 좋은 부모와 형제를 만나지 못해 방황하는 젊음들이 ‘불우’청소년일 테고, 경제적 형편이 좋지 못해 고생하는 사람이 ‘불우’이웃이다.

세상에서 ‘만남’은 그토록 중요하다. 우연히 누군가를 마주치면 조우(遭遇), 그저 우연성만이 눈에 띄는 만남은 기우(奇遇), 마주친 상황이 경우(境遇), 어여쁜 이를 만나면 염우(艶遇)다. 遇(우)에는 ‘남을 상대하는 태도’의 뜻도 있다. 예로써 대접하면 예우(禮遇), 박절하게 대하면 냉우(冷遇), 가혹하게 대하면 혹우(酷遇), 그 정도가 더 심하면 학우(虐遇)다.

세상을 못 만났고, 사람을 못 만났기 때문에 불우(不遇)일까. 나이 들면서 생각해보면, 만나지 못하는 ‘불우’의 상황에는 제 몫도 있다고 보인다. 만났어도 그냥 지나쳐 버린 사람이나 때, 주의하지 못해 그 중요성을 간과함으로써 호기(好機)를 살리지 못한 잘못 등 말이다. 아니면 제가 사납거나 퉁명스러워 다가오는 기회나 사람을 머뭇거리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큰 뜻이나 좋은 재주 품은 사람이 버려지면 곤란한 사회다. 태항산처럼 험하고 깊은 곳이 대한민국 사회다. 그곳에서 설령 소금수레 끌지라도 제가 ‘천리마’라면 기죽지 말아야 옳다. 조조(曹操)가 남긴 명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늙은 천리마가 구유에 엎드려 먹이를 먹음은, 그 뜻이 천리를 내닫는 데 있음이라. 뜻이 강한 사람은 늙어가면서도, 그 장한 마음 굽히지 않으리니(老驥伏櫪,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 불우의 인재들이여, 차가워진 겨울 날씨에도 결코 움츠러들지 말기를….

 

<한자 풀이>

遇 (만날 우): (우연히)만나다. 조우하다. 상봉하다. 대접하다, 예우하다. (뜻을)얻다. 합치다, (뜻이)맞다. 짝하다, 맞서다. 성교하다. 막다.

驥 (천리마 기): 천리마. 준마.

鹽 (소금 염): 소금. 자반. 노래 이름. 후렴. 산(山) 이름. 못 이름. 절이다.

遭 (만날 조): (우연히)만나다. (나쁜 일을)당하다. 두르다. 둘레. 번(횟수). 바퀴(둘레를 세는 말).

櫪 (말구유 력, 말구유 역): 말구유(말에게 먹이를 주는 그릇). 마판(馬板: 마구간의 바닥에 깔아 놓은 널빤지). 상수리나무. 형구의 한 가지.

 

<중국어&성어>

怀(懷)才不遇 huái cái bū yù: 뜻풀이는 본문과 같다. 재주를 품고 있으면서도 시절과 사람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쓴다. 자주 쓰는 성어다.

黄钟(鐘)毁弃(棄),瓦釜雷鸣(鳴) huáng zhōng huǐ qì,wǎ fǔ léi míng: 黃鐘(황종)은 중국 고대 악기 중 구리로 만든 종으로 가장 우아한 음률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 瓦釜(와부)는 질그릇으로 만든 낮은 품질과 음률의 악기다. 좋은 악기는 버려지고(毁棄), 진흙으로 만든 낮은 품질의 악기만 요란하게 울린다(雷鳴)는 뜻이다. 훌륭한 인재는 쓰이지 않고, 그 반대의 사람들만 활개치는 경우를 가리킨다. 자주 쓰는 성어다.

骥(驥)服盐车(鹽車) jì fú yán chē: 본문에서 푼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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