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벼리기자
  • 입력 2015.12.21 16:25

<해외취업 수기부문 우수상> 글·사진 황지은 The New-York Historical Society Museum & Library 총괄 디자이너

[뉴스웍스=김벼리기자]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5년 나는 26세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뉴욕을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박물관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던걸까?  

한국 역사를 사랑해 미대 시각 디자인과 재학 중에도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를 들고 한국의 문화유산을 찾아 산과 바다를 누비던 내가 미국의 뉴욕역사 박물관에서 그래픽 디자인 총책임자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뒤돌아보면 내게 주어졌던 기회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다.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인 The New-York Historical Society Museum & Library에 근무 중인 황지은씨

 

대학 졸업 후 예술의전당에서 근무하다  2년 뒤 퇴사하고 뉴욕에 온지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현재 The New York Historical Society Museum & Library에서 인턴과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를 거쳐 수석 그래픽 디자이너로 7년 반째 근무 중이다. 

◆ 한국 산업인력공단 2기 해외인턴의 기회

예술의전당 퇴사후 토플과 유학을 준비하던 2005년, 우연히 한국 산업인력공단에서 제 2회 미국인턴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접한 후 Washington D.C의 비영리단체인 국제아동예술기금(International Child Art Foundation)에서 그래픽 디자인 인턴으로 3개월간 일했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던 내가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막역한 우정을 나누던 추억, 그리고 협회 직원들이 따뜻한 격려로 나의 디자이너로서의 가능성을 이야기 해주며 그들의 2006년 대회에서 실제로 내 디자인이 쓰였던 것 등은 아주 값진 경험이었다. 

워싱턴에 위치한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나의 눈을 뜨게 해주는 실로암의 샘물처럼 신기하고 멋진 전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시 내용뿐만 아니라 전시 기획 및 디자인에 있어서도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춘 해설판(exhibition didactic panels)들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 곳에서 사진 자료 및 관람객 브로슈어 등을 수집해  훗날에는 디자인 리서치북을 완성하기도 했다.

워싱턴에서의 인턴십 경험은 한국을 한 번도 떠나본 적 없이 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만 하던 내게 큰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됐다. 나는 끊임없이 ‘반드시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성공하리라’, ‘한국인 특유의 세밀한 예술 감각을 발휘해 미국의 박물관에서 전시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가 되리라’ 라며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 뉴욕, FIT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SUNY)에서 공부하다

28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었지만 워싱턴 인턴십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뒤라 망설임 없이 뉴욕FIT의 Exhibit & Display Design  2년 프로그램 (현재는visual presentation and exhibition design로 명칭 변경됨)에 등록하였다.

2년제 학기 수업이 한국에서 미대 학부 졸업 후 대학원을 다니며 실무를 했던 나에겐 그리 어렵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 학생들의 뛰어난 실력을 인정하는 교수들과 현지 학생들의 인지도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 정도의 언어 이해력이 필요한 과제를 수행할 때는 친구들이 그들의 노트 필기를 보여주거나 교수님들이 따로 시간을 내 설명을 해 주기도 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어린 친구들에게 컴퓨터 그래픽 툴을 가르쳐주거나 교수님들의 개인 프로젝트를 도와드리기도 했다. 

학교 튜터링 센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번 돈으로는 용돈 및 과제비에 썼고, 가방 회사에서 디자인 업무를 하며 부족한 생활비에 보태기도 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나는 절대로 디자인과 관련이 없는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많은 유학생들이 높은 물가와 집세 때문에 피치 못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수업까지 병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는 신분 때문에 현금을 벌수 있는 한국인 식당이나 슈퍼마켓 등에서 일을 하곤 한다. 뉴욕에서는 그런 일들을 쉽게 찾아볼 수가 있으며, 나중에는 많은 이들이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한 채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아르바이트가 직업이 되어 자신의 원래 목적을 잃어버리고 뉴욕에서 거주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접게 되는 경우들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 후 2007년, 미국의 소매환경연합(Association for Retail Environments)에서 주최하는 미국 전역 학생 디자인 공모전에서 시각 판촉(visual merchandising) 분야에서 수상을 했고, 2008년에는 최우수 졸업생(Summa Cum Laude)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졸업 과제나 논문에 대한 평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뛰어난 후배들을 지속적으로 박물관에 인턴으로 영입하는 일도 하고 있다. 

◆ 가장 오래된 박물관에서 설립 최초로 취업 비자 스폰서를 받은 한국인

뉴욕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The New-York historical Society)는 뉴욕 맨하탄에 위치한 뉴욕 최초의 박물관이다. 미국 역사와 관련된 귀중한 많은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티파니 램프(Tiffany Lamp) 컬렉션부터 9.11 테러 현장 보존품까지 방대한 뉴욕 역사의 저장고라고 말할 수 있다. 

처음 내가 인턴으로 발을 디딘 2008년에는 역사 깊은 박물관답게 그 어떤 기관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성과 같은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듯했다. 그런 박물관에서 나는 인턴쉽 과정 3개월, 선택실무훈련기간(Optional Practice Training Period) 1년 후 최초로 비자 스폰서를 받은 외국인 근로자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점은 그들에게는 번거로운 취업 스폰서를 해주어야 할만큼 내가 박물관에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신분 제약이 있는 외국인 근로자보다는 박물관에서 근무를 희망하는 많은 현지인들을 채용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 한국식으로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다

내가 인턴을 거쳐 어시스턴트 디자이너 그리고 그래픽 총괄이 되기까지 나에게 회사는 마치 집과도  같았다. 박물관에서 주말에도 늘 사무실에 출근하는 직원은 흔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뉴욕을 대표하는 역사 문화 기관인 만큼 그들이 구사하는 수준 높은 영어는 내게 가장 힘든 부분이기도 했기에, 언어로 표현 하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남들보다 늘 2~3배 이상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다.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늘 2~3배수 많은 시안을 제시해 내가 가진 단점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새로운 소재를 연구해 전시 설치 분야에서도 쉽고 경제적인 방법을 제시하는데 노력했다. 주말에는 늘 다른 박물관이나 트레이드쇼 등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였고 기회가 되는 대로 거래 업체들과 친밀하게 연락을 하며 그들에게서 새로운 정보들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절약한 전시비용을 눈에 보이는 수치로 계산해 인사 평가 노트에 첨부하기도 했다. 

미국 기업문화는 실리적이기에 한국의 기업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지만 어느날부터인가 한국인 고유의 근성이 이곳에서 의도치 않게 굉장한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미국인들에게 나만의 방식대로 신임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일적으로는 철두철미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유연한 사람이라는 점을 어필했다. 직원들의 생일파티나 경조사에 늘 손수 디자인한 카드를 사람들에게 돌려 축하 메세지를 받아주거나 개인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직원에게 먼저 다가가 도움을 준다던가 하는 등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일적으로는 정확하고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 인턴으로 입사 3년 만에 그래픽 디자인 부서 총괄로 승진

그렇게 노력한 끝에 입사 3년 만에 헤드 그래픽 디자이너로 승진했다. 2011년 70억 규모의 대대적인 박물관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에서 리드 디자이너로, 그 외에 매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주요 역사 전시회에서 그래픽 디자인팀을 지휘하기도 했다. 또한 박물관의 교육팀 홍보팀 발전부서팀에 스타일 가이드라인을 배포해 각종 홍보물 및 교육 자료물들에 대한 제작을 지휘했다. 아울러 각종 발전기금 마련 행사나 정부 기금 제안서에도 깊숙이 관련해 여러 부서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노력하였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어느덧 내가 직접 디자인한 전시의 홍보물이 뉴욕 지하철이나 신문에 크게 실리는 일을 목격하는 것이 보람된 일과가 됐다.

영어에 자신이 없어 긴 대화를 이어가지 못해 예스만 하던 ‘YES GIRL’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내가 이젠 거래 업체나 협력 단체들에게 내 의견을 정확히 피력하고 5명의 미국인 어시스트 디자이너와 2명의 인턴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의 내 모습은 과거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달라져 있다. 

지난 2011년부터는 세계제2차대전, 중국 이민자 역사전, 아모리쇼 100, 컴퓨터 역사전 등 박물관의 메이저급 전시를 리드했고 내년에 열리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전시를 준비 중에 있다. 각각 1~2년 정도 준비기간이 필요한 대형급 전시부터 내일 당장 인쇄소에 넘겨야 하는 기금 마련 브로슈어까지, 내 손을 기다리는 많은 일들 때문에 뉴욕에서의 내 삶은 일분일초가 소중하고 바쁘다. 

10년 전에 관광객으로 뉴욕을 방문하던 때를 떠올리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뉴욕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가게에서 물 한 병 사는 것마저 두려웠던 뉴욕이 이젠 내 작품을 실어주는 거대한 전시장이 되었다. 

가끔 내가 만일 한국에 그냥 머무르고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그들이 속해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아갈 무렵 언어 장벽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며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던 과정들을 밟았다. 지금은 어느 정도 내가 세운 목표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10년 후엔 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나에게 올 작은 기회를 소홀히 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히 살다보면 미래에는 또 어딘가에서 내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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