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박경보 기자
  • 입력 2018.06.29 05:32

국산 생필품시대 열고 라디오 국내최초 생산…연간매출 160조원대로 성장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사진제공=LG그룹>

[뉴스웍스=박경보 기자] LG그룹이 본격적인 ‘구광모 시대’에 돌입한 가운데 선대 회장들의 업적이 주목받고 있다. 포목상으로 출발한 LG가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서기까지는 창업주 구인회 회장부터 2대 회장 구자경, 3대 회장 구본무에 이르기까지 리더들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올해로 창업 71주년을 맞은 LG그룹은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선구자이자 세계시장의 손꼽히는 전자기업으로 우뚝섰다. LG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LG화학)의 임직원은 불과 20여명이었지만 현재의 LG그룹은 국내외 22만2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변화와 혁신을 추구했던 선대회장들의 노력은 오늘날 LG가 재계의 거목이 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

LG그룹의 역사는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 만든 마을협동조합에서부터 시작됐다. 구인회 회장은 1931년 친동생 구철회와 함께 연 구인회상점이란 포목상을 기반으로 운수업·무역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다가 화장품 사업에 관심을 갖고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게 된다. LG그룹의 구씨 일가는 이때부터 GS그룹의 허씨 일가와 동업관계를 이뤘다.

당시 락희화학공업사가 제조했던 화장품인 럭키크림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동동구리무'라고 불리며 큰 인기를 얻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치약과 칫솔, 비누, 합성세제 등 생필품을 국산화시킨 구인회 회장은 락희화학공업사를 국내 최대 화학제품업체로 성장시켰다.

화학공업의 성공을 기반으로 전자산업까지 뛰어든 구인회 회장은 1958년 10월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를 설립했다. 금성사는 설립 후 약 1년만에 제1호 국산 라디오인 'A-501'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구인회 회장의 경영철학이었던 `가족`과 `인화`는 LG그룹이 국민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구자경(왼쪽) LG그룹 2대회장과 구본무 LG그룹 3대회장. <사진제공=LG그룹>

1968년 1월 럭키그룹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한 구인회 회장은 2년 뒤인 1970년 1월 장남인 구자경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긴다. 구자경 회장은 취임 후부터 1995년까지 럭키금성그룹 회장직에 있으면서 취임 당시 매출 260억원이었던 그룹매출을 30조원 규모까지 끌어올렸다.

구자경 회장 취임 이후 럭키로 이름이 바뀐 LG는 화학산업과 전자산업을 기반으로 석유화학, 정밀화학, 에너지,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와 건설, 유통, 증권, 보험 및 금융 등 서비스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크게 확장했다.

199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구자경 회장의 뒤를 이어 3대 회장에 취임한 구본무 회장은 특유의 리더십으로 LG그룹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LG그룹이 'LG'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구본무 회장의 취임 이후부터다.

LG그룹의 매출액은 구본무 회장 취임 당시 30조원 규모에서 GS, LS 등을 계열분리하고도 160조원 규모(2017년 말)로 다섯 배 이상 성장했다. 이 가운데 해외매출은 10조원에서 110조원대로 열 배 이상 비약적으로 늘었다.

구 회장은 LG 사업군을 ‘전자-화학-통신서비스’ 3개 핵심 사업군으로 구축해 경쟁력을 높이며 LG를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이끌었다. 지금의 LG유플러스, LCD,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이 구본무 회장의 대표적인 성과다. 특히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으로 전기차용 배터리, OLED, 에너지, 바이오 등의 신사업을 육성하며 미래 먹거리를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밖에도 구본무 회장은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국내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고 ‘LG 의인상’을 만들어 남다른 사회공헌 철학을 실천하기도 했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