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2.23 15:12

(3) 맥아더의 리더십-4

1950년 11월 말 아군은 크리스마스 공세
그에 맞서 중공군은 2차 공세로 대응해
국군 2군단 와해에 이어 미군에도 재앙…
 

> 깊은 동굴 진지에 몸을 숨기고 싸움에 나서고 있는 중공군 모습이다. 그들은 아주 노련했다. 1950년 10월 25일 기습적으로 유엔군 전선을 강타하고 나섰던 중공군은 상당한 수확을 올렸다. 미 1기병사단의 1개 연대는 그들의 포위에 갇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상당수는 포로로 붙잡혔다. 중공군 1차 공세의 전과였다. 그럼에도 중공군은 재빨리 몸을 감췄다. 11월 초순까지 이어지던 공세 뒤에 그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부의 오판을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잡았던 포로들을 풀어줬다. 역시 맥아더의 오판을 부르고자 함이었다. 그런 중공군의 전략에 맥아더 사령부는 속절없이 말려들었다. ‘일시적인 공세만 벌인 뒤 한국 전선에서 철수할 것’ ‘대규모 병력의 투입이 아니라 체면만 내세우려는 임시 개입’이라는 판단을 내리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 1950년 11월 추수감사절 식사를 하는 미군의 모습이다. 장소는 흥남 인근이다. 상륙정을 타고 원산 인근에서 뭍에 오른 미 1해병사단이다. 적정에 관한 판단은 매우 중요하다. 세밀한 부분을 놓치면 대단한 위험이 닥칠 수 있다. 맥아더 사령부는 1950년 11월 하순에 접어들어 대규모 공세 명령을 내린다.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였다.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벌어진 중공군과의 조우전에서 쓰라리게 당했던 아픔은 벌써 잊었다.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기존의 판단을 그대로 유지했다. 추수감사절의 풍성한 식사를 마친 뒤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생각에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다시 북진에 나선다. 그러나 그곳에는 엄청난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선에서 적의 의도를 간과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을 결정하고 지휘했던 마오쩌둥(왼쪽)과 그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이다. 마오안잉은 1950년 11월 25일 평북에 있던 중공군 총지휘부 인근의 동굴 근처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고 즉사했다. 중국 최고 지도자가 한국 전선에서 그의 친아들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전체 중공군의 피해는 가벼웠다.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벌어지는 2차 공세의 초반에서는 그랬다. 아군은 심각한 피해에 직면했다. 한국군 2군단은 평북 일선에 있다 7사단과 8사단이 무너졌다. 앞서 중공군 1차 공세 때 압록강 물을 뜨기 위해 선두에 섰던 6사단의 와해 뒤에 다시 7, 8사단이 무너지면서 국군 2군단 전체는 해체의 운명을 맞고 말았다.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던 미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외 없이 아군 전체는 큰 위험에 빠졌다. 장수의 조그만 오판, 적을 얕잡아봤던 허점이 부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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