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2.23 18:00
조선시대 지금의 종로, 즉 운종가에 있던 옛 보신각의 모습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잦았던 서울의 중심이다.<한국콘텐츠진흥원>

 

고종 때 만든 보신각(普信閣)을 지금 우리는 종각(鐘閣)이라고 적고 부른다. 鐘路(종로)는 鍾路(종로)가 아니다. 지하철 종로역 편에 다시 이야기하겠으나, 鐘(종)과 鍾(종)은 모양새는 비슷해도 의미는 다르다. 앞의 鐘(종)은 구리 등으로 만든 진짜 ‘종’이고, 뒤의 鍾(종)은 원래 술잔을 가리키는 글자다.

이 두 글자가 요즘 한국에서는 쉽게 섞여 쓰이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종각을 정확하게 적으려면 鐘閣으로 표기해야 옳다. 서울 거리 한복판에 종을 매달고 이를 울린 시기는 조선을 건국했던 태조 연간으로 올라간다. 그 뒤 없어졌다가 세조 때 이르러 큰 종을 다시 만들어 걸었고, 임진왜란 때 없어졌던 것을 광해군 때 다시 만들었다.

그런 여러 곡절을 거쳐서 1895년 고종이 다시 종을 가져다가 보신각이라는 건물을 지은 뒤 그곳에 안치했다. 여러 풍상을 겪기는 했지만 어쨌든 서울 한복판인 종로 핵심 지역에 종을 걸어두고자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옛 시절에는 시간을 잴 마땅한 계기(計器)가 아주 적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 사람들의 생활에서도 시간은 중요했다. 사람들이 한 데 모여 형성하는 사회라는 곳은 일정한 기준을 여럿 만들어야 잘 돌아가는 법인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일 테다. 서로 정해진 시간에 따라 움직여야 관청도 돌아가고, 일반 저잣거리의 상업 행위도 이루어진다.

그런 시간을 알려주는 게 과거 조선에서는 바로 종이었다. 그렇다고 매 시간을 알려줬다는 얘기는 아니고, 새벽과 밤을 알릴 때 이 종을 쳤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지금의 밤 10시에 종을 28차례 때렸다. 그 횟수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별자리 28수(宿)의 상징이란다. 이를 인정(人定)이라고 했다. 사람들이(人) 제 자리를 찾아 머문다(定)는 뜻일 게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통행금지’다.

그 반대가 파루(罷漏)다. 바루 또는 바래, 바라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새벽 4시(五更三點)에 모두 33차례 타종했다. 그 횟수는 불교의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33개의 하늘을 의미하는 숫자라고 한다. 왜 한자 명칭에 ‘끝낼 파(罷)’, ‘샐 루(漏)’라는 글자를 붙였을까. 관련 자료를 찾아봐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뒤의 루(漏)는 조선시대 물시계를 뜻하는 자격루(自擊漏)의 그 글자다.

이로 미뤄 짐작할 때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했던 시각(漏)이 끝나는(罷) 때라고 해서 이런 이름을 적었으리라고 보인다. 실제 과거의 시계를 가리키는 말 중에는 물방울이라는 의미의 滴(적)이라는 글자를 써서 만든 ‘적루(滴漏)’가 있다. 물을 일정하게 떨어뜨리면서 시간을 잰, 이를 테면 물시계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 물시계는 낮 시간에 해당하는 ‘주루(晝漏)’와 ‘야루(夜漏)’로 단위를 구분한다. 罷漏(파루)라는 단어는 그 야간의 시간 단위인 夜漏(야루)가 끝나는(罷) 때를 가리켰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삼국시대의 신라와 고려 때도 시간을 알리는 방식은 다양하게 존재했다고 한다. 조선에 들어와서 서울 종로 또는 그 인근에 종을 걸어놓고 시간을 알리는 방식이 줄곧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조선 말 고종 때의 기록을 보면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 발사’도 있었으니 그 속내는 제법 다양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새벽은 종소리, 밤은 북소리가 어울린다고 봤던 듯하다. ‘晨鐘暮鼓(신종모고)’라는 성어까지 나와 있으니 말이다. 새벽(晨)에는 종(鐘)으로, 밤(暮)에는 북(鼓)으로 시간을 알린다는 뜻의 성어다. 그러나 그 바탕은 불가(佛家)다. 절에서 새벽을 일깨우기 위해 종을 쳤고, 하루의 마감을 알릴 때는 북을 두드렸다는 얘기다.

그러나 반드시 새벽에는 종을 쳤고, 밤에는 북을 쳤던 것은 아니다. 무엇을 먼저 치느냐가 문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새벽에는 종을 앞에 쳤고, 밤에는 북을 먼저 쳤던 점만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불교가 유행했던 당(唐)나라 이후에는 분명히 그랬던 듯하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이 중국에 뿌리를 내리기 이전인 한(漢)나라 때는 그 반대였다는 기록도 있다. 아침에 북을 울리고, 밤에는 종을 두드렸다는 얘기다. 하기야 북소리는 동적(動的)이고 종소리는 정적(靜的)이다. 전쟁터에서 진격(進擊)을 명령하는 신호음을 북소리로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럴 듯하다. 따라서 한나라 무렵에는 ‘晨鐘暮鼓(신종모고)’가 아니라 ‘晨鼓暮鐘(신고모종)’이었던 셈이다.

이런저런 사정을 다 생략하고 그냥 종소리로 시간을 알렸던 조선이 오히려 현명해 보인다. 북을 섞지 않아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종을 빚는 솜씨가 뛰어나 청동에서 울리는 소리가 그윽하기로는 세계 으뜸의 ‘한국 종소리’ 아니던가. 그래서 종을 치는 타종(打鐘) 의식은 오늘에도 생생하게 살아 이어지고 있다.

‘제야(除夜)의 종’은 요즘의 대한민국 연인에게, 젊은이에게, 그리고 나이 든 사람에게도 모두 세월을 돌아보게 하는 장치다. 해마다 12월31일 자정 무렵에 이 종각이 있는 종로 인근은 사람들이 물결을 이룬다. 옛 조선시대 내내 쳤던 罷漏(파루)의 종소리가 이 때 울린다. 모두 33번을 때린다.

除夜(제야)는 무엇인가. 원래는 제석(除夕)이라고 많이 적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歲除(세제-한 해의 끝, 또는 나머지)라고 적었고, 그 날의 밤이라고 해서 除夕(제석)이라고 했다가 除夜(제야)로 변했다. 除夕(제석)은 지는 해를 보내고 새로 오는 해를 맞이한다는 의미의 이벤트다. 굳이 성어로 표현하자면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묵은 것(舊) 털어서 보내버리고(送), 새 것(新) 맞아들인다(迎)는 식의 엮음이다. 送舊迎新(송구영신)의 각오를 이 자리에서 세워보는 사람들이 워낙 많다.

그 세월의 흐름 속에 이미 떠난 것,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보낸 것을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법. 불가에서 치는 새벽의 종과 저녁의 북이 그런 의미다. 그렇게 울리는 종소리와 북소리를 들으며 영겁(永劫)의 세월 속에 말없이 묻혀가는 이 생명의 덧없음을 깨달으면 오히려 인생의 참 의미를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보신각의 종소리는 그냥 흘려들을, 그저 그렇고 그런 소리만은 아니다.

<지하철 한자 여행 1호선>, 유광종 저, 도서출판 책밭, 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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