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기 교수
  • 입력 2018.08.06 11:00

한국의 미래, 노동문제 해결에 달렸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7년 여름, 산업현장은 노동운동으로 한층 뜨거웠다. 대형 사업장마다 파업이 벌어지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파업에는 폭동이 난 것처럼 과격한 시위가 뒤따랐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절차에 따라 파업이 발생한 것도 아니었지만 사업주는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고 노동부 지방관서는 공격 받으며 쩔쩔매었다. 그래도 노동운동을 비판하는 여론은 작았다. 권위주의 체제를 붕괴시킨 민주화 운동의 일부로 여기는 분위가가 컸다. 파업의 불법성이나 폭력성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불똥은 노동조합에도 튀었다. 노동조합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조합장이 쫓겨나고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집행부를 맡았다. 한국노총이 주도하던 노동계도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면서 양분되었다.

민주화 운동으로 정치가 바뀐 것보다 노동운동으로 노사관계가 바뀐 변화가 훨씬 극적이었다. 힘의 우열이 바뀌어 노동조합은 사용자가 두려워할 정도로 막강해졌고 작업현장의 관리자는 노동조합 간부의 눈치를 봐야했다.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정당은 노동계에 손을 벌렸고 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명분으로 노동계의 정책참여를 제도화했다. 경영계는 정부의 눈치를 살피며 들러리 서는 위치에 서게 되었고 반대라도 하면 재벌옹호나 반개혁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노동계는 진보진영의 핵심 중의 핵심 조직 기반이 되면서 정책무대는 물론 정치무대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30년 사이 작업현장부터 정치현장까지 노동계와 경영계의 힘의 불균형은 굳어져왔다.

노동계와 경영계 그리고 정부의 상호작용은 노사관계 체제를 형성했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은 87노사관계 체제를 만들었다.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87노사관계 체제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리고 개선할 과제가 무엇인지 점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너무 조용하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고용악화, 소득 불평등 뿐 아니라 별로 주목받고 있지 못하는 중산층 쇠퇴 등만 보아도 87노사관계 체제는 명백한 한계를 보인다. 그러나 87노사관계체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노사관계 체제개혁을 주도할 정치‧경제‧사회 주체가 실종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노동계의 힘이 너무 강하고 정치권과 언론이 노동계 눈치 보며 침묵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30년을 끌어갈 포스트 87노사관계 체제가 필요하다. 힘이 센 특정 계층의 근로자가 아니라 취약 계층의 근로자 그리고 전체 근로자의 이익을 실현시키는 노동운동과 노동정치가 필요하다. 미국이나 북부 유럽처럼 정상적인 노동운동은 중산층의 이익에 기여한다. 중산층의 삶의 기반이 노동에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노동정치는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중산층은 유권자 분포의 가운데에 있으면서 극단으로의 쏠림과 정치 불안을 막기 때문이다. 브라질 등 남미의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중진국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위기가 지속되는 이유도 편향된 노동운동과 노동정치에 기인한다.

한국은 20세기 마지막에 노동운동이 꽃핀 나라로 평가받는다. 덕분에 노동계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올 만큼 노동운동 출신 정치인이 즐비하다. 여야 원내대표와 고용노동부장관 뿐 아니라 산업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했거나 노동조합에 몸을 담았던 정치인들이 국회를 비롯해 곳곳에 포진해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이 중산층의 확대 덕분에 가능했기에 지금은 그 공을 중산층에게 돌려주는데 앞장서야 한다. 왜곡된 노동운동과 노동정치를 바로잡아 87노사관계 체제의 나쁜 유산은 거두어 내야 한다. 이것이 자신을 키워준 국민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노동운동가나 노동정치인은 솔직해져야 한다. 기술혁신, 세계화, 고령화의 시대사적 변화는 기존의 노동운동과 노동정치로 대응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조직화가 용이하고 성과를 거두기 유리한 대기업을 겨냥해 임금임상과 고용보호에 매달리는 손쉬운 노동운동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근로자의 삶의 악화를 대기업에 탓을 돌리고 비정규직 근로자의 아픔을 비정규직 금지로 해결한다는 단순한 노동운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대기업·정규직 근로자의 임금인상과 고용보호가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에 전가되는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았다.

불평등을 실제보다 과장하고 기업을 부도덕한 존재로 각인시키는 노동운동과 노동정치는 자동화로 고용을 대체하고,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게 만들며, 일·가정의 양립에 편리한 유연한 근무형태를 만들기 어렵게 해 결국 힘없는 근로자를 희생시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87노사관계 체제는 민주화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민주화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새로운 노동환경 즉, 기술혁신, 세계화, 고령화는 외면했다. 포스트 87노사관계 체제는 이러한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담아내야 한다. 대기업·정규직의 양보, 중소기업·비정규직의 실질적 권익 향상, 중산층의 회복이 노동운동과 노동정치의 책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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