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기 교수
  • 입력 2018.08.20 13:48
김태기 단국대 교수

GM대우군산공장은 폐쇄되는데 르노삼성은 왜 잘 나가는가? 두 회사 모두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의 아픔을 겪었다. 그 이후에도 GM대우는 경영 환경 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처했지만 르노삼성은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이러한 차이가 두 기업의 운명과 근로자의 처지를 전혀 다르게 만들었다. 경영 환경 변화에 대한 대처의 차이가 기업의 운명을 바꾼 사례는 자동차뿐 아니라 타이어, 금융, 병원 등 산업 곳곳에 수두룩하게 널려있다. 경영 환경이 비슷해도 기업의 운명이 엇갈렸듯이 한국 경제의 운명도 지난 30년 사이에 180도 바뀌었다.

믿기 어렵다고 말할지 모른다. 한국에 경제성장률이 올라가고 소득불평등은 떨어진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이전의 이야기다. 경제성장 초기 단계에 소득불평등이 커진다는 기존의 지배적 학설과 배치되었기에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은 촉각을 세우고 한국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반면, 소득불평등은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악화 추세가 지난 30년 동안 지속되면서 외국의 경제학자들도 한국을 의아하게 보고 있다. 더군다나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악화 속도가 급속히 빨라져 OECD 등 국제기구는 한국에 우려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경제성장과 소득불평등의 관계는 노동시장제도에 좌우된다. 임금과 고용의 결정은 경기를 당연히 반영하지만 나라마다 다른 이유는 제도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북부 유럽처럼 노동시장제도가 유연한 나라는 임금수준이 높고 실업률과 소득불평등은 낮다. 반면, 남부 유럽처럼 경직적인 나라는 임금수준이 낮고 실업률과 소득불평등은 높다. 한국이 경제성장이 정체된 국가로, 저임금계층 비중과 소득불평등이 올라가는 국가로 바뀐 이유는 노동시장제도가 경직화되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은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임금과 고용이 단체교섭제도의 산물로 급격히 바뀌었다.

경기가 계속 좋을 수만 있다면 괜찮겠지만 나빠지면 노동시장제도의 유연성과 경직성은 매우 다른 결과를 야기한다. 유연하면 경기가 악화되어 기업의 수익이 감소할 때 실질 임금이 내려가고 고용도 줄게 된다. 그러나 경직적이면 그렇지 않다. 경직적인 제도 때문에 실질 임금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 대가로 고용 감소폭이 그만큼 커지는 것을 감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실업률이 올라가도 방치하면 결국 GM대우군산공장처럼 기업이 줄줄이 문을 닫아 대량 실업이 발생한다. 남부 유럽이 경제 위기에 취약한 이유는 노동시장제도가 경직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과 일본이 사실상 실업 없는 완전고용사회에 도달한 이유는 노동시장제도가 유연해 경기 회복에 의한 고용 증가의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제도의 경직성은 문제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기업정규직처럼 노동조합의 혜택을 받는 힘 있는 근로자와 그렇지 못한 근로자 사이의 소득불평등이 커지게 만든다. 경직적인 노동시장제도 하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노동조합 덕분에 임금을 유지하고 고용보호까지 받는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담은 유연한 노동시장제도 하에서 일하는 힘없는 근로자에게 전가된다. 결국 경직성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만든다. 따라서 노동시장제도의 경직성은 혜택을 보는 소수 근로자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사회 전체로 보면 다수 근로자에게 손해를 끼치고 공정성을 해친다.

소득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소득재분배와 복지를 확대한다. 한국을 포함해 어떤 나라든 복지국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이 유연한 나라는 소득재분배의 효과가 크지만 경직적인 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소득재분배와 복지는 노동시장에서 결정된 임금과 고용의 문제를 사후적으로 보완해주는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제도가 경직적이면 사회복지가 노동조합 덕분에 힘이 있는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쉽다. 이 때문에 노동시장제도의 경직화는 한국이나 남부 유럽처럼 복지의 양극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복지지출을 아무리 늘려도 혜택이 비대칭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빈곤문제도 해결하기 어렵게 된다.

소득불평등 해소와 신분의 상향 이동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교육도 노동시장제도의 경직성과 유연성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 유연한 나라는 교육이 창의성을 키우는데 주력하는 반면, 경직적인 나라는 학위나 성적 등 지식 쌓기에 몰입하게 된다. 유연한 나라는 좋은 직장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데 필요한 창의성이 중요한 반면, 경직적인 나라는 이동성이 낮기 때문에 일단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직적인 나라는 시험 준비 등으로 교육을 받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는 반면, 교육의 생산성이 낮아 혁신능력과 경제성장도 저조하다. OECD조사에서 한국이 근로자의 교육수준이 높지만 문제해결능력이 낮은 국가로 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기업과 국가의 혁신 역량을 키우는데 필수적인 연구개발에 대한 지출도 교육처럼 한국은 OECD국가 중에서도 최 상위권에 속한다. 그러나 연구개발의 성과가 낮아 ‘연구개발의 역설’이 발생한다. 즉, 투입대비 성과가 낮은 고비용저효율의 문제가 생긴다. 신기술의 도입과 개발은 유연한 대응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데 노동시장제도의 경직성이 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복지지출의 증가 속도와 교육에 대한 지출 규모가 OECD국가 중에서도 매우 크지만 효과가 낮아 ‘복지의 역설’, ‘교육의 역설’이 발생하는 것처럼 똑 같은 문제가 연구개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유럽과 일본 등 세계 각국은 국운을 키우는 차원에서 노동시장제도의 유연성을 높이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노동시장제도의 경직성이 경제성장, 고용, 소득분배, 교육, 연구개발 등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지만 이 문제를 직시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매우 미미하다. 노동시장제도의 유연화가 일자리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수적인데도 불구하고 아예 모른 체하고 엉뚱한 사업이나 벌리고 있다.

이렇게 되면서 한국은 재정확대의 속도가 빨라졌다. 일자리와 소득불평등 악화처럼 노동시장제도의 경직성이 야기한 문제를 재정 투입 확대로 해결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국민소득이 증가하는 속도보다 재정확대의 속도가 빨랐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 식의 재정낭비만 횡횡하였다. 노동시장제도의 유연화 없이 일자리문제를 해결하겠다면 어떤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한국 경제가 안 풀리는 진짜 이유를 해결하는데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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