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2.28 09:14

(3) 맥아더의 리더십-5

> 김포 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 장군(왼쪽)을 이승만 대통령이 영접하고 있다. 맥아더의 실수를 이야기하다 보니 그의 허점만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장군이었다. 당시 6.25전쟁의 와중에서 아군과 적군을 통틀어 그보다 현대전을 잘 이해한 지휘관은 없다는 게 백선엽 장군의 회고다. 아울러 그는 통이 컸고, 선이 굵었다. 따라서 조그만 패배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본질적인 승리에 더 집착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맥아더는 압록강 진출에 그치지 않고, 베이징 입성까지 염두에 두고 전쟁을 펼쳤던 지휘관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럼에도 그는 디테일에 비교적 무심했다. 그로써 불러들였던 패착이 1950년 10월 말부터 그해 12월 중순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중공군은 11월 말에 벌어진 아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스스로의 ‘2차 전역(戰役)’ 초반에 아군을 크게 제압했다. 평북 운산으로 진군하던 미 2사단, 장진호를 경유해 북상하려던 미 1해병사단 등이 중공군의 매복에 걸렸다.
 

> 협곡 속에 들어선 미군이 중공군 공격에 갇혀 처참하게 패배했던 곳의 사진이다. 미 2사단의 경우는 참혹했다. 사단의 주력인 2개 연대가 후퇴하다가 깊고 좁은 협곡에 갇혔다. 인디언이 백인 포로를 잡았을 때 양쪽에 죽 늘어서서 포로를 그곳으로 지나가게 한 뒤 마구 때리는 이른바 ‘인디언 태형(笞刑)’이 그와 흡사하다고 해서 당시 싸움은 그 이름으로 불렸다. 죽음의 골짜기이기도 했다. 미 2개 연대는 그 인디언 태형의 깊은 계곡을 지나면서 병력의 대부분, 장비와 무기의 상당수를 그곳에서 잃었다. 미군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참패의 하나였다. 미 2사단은 평북 영원과 덕천에 진출했다가 먼저 중공군에게 무너진 한국군 2군단을 보완하기 위해 급히 북상했다가 패배에 직면했다. 그들 또한 진출하는 곳에 퇴로를 설정하지 않은 채 마구 북진했던 까닭에 참혹한 결과를 빚었다. 맥아더의 자신감, 그를 무조건 따랐던 전선 지휘관의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었다. 

 

> 중공군에게 붙잡히고 있는 미군의 사진이다. 전쟁터에서 적의 정황을 파악하기는 매우 힘들다. 제가 거느린 수색대의 정보가 가장 확실하다. 나머지는 기만과 유인 등 적의 노림수가 섞인 정보나 첩보가 대부분이다. 그럴 경우 나아가고 물러섬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나아가더라도 불확실한 정황 속에서 작고 하찮은 정보라도 최대한 모으면서 상황을 줄곧 저울질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나아가는 길에 후퇴할 경우를 대비해 퇴로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나아가 미군의 전선 지휘관 등이 대개 그 점에 게을렀다. 아니, 방심했다고 하는 편이 더 솔직하다. 적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늘 출현한다. 만일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을 경우 실패는 곧장 현실로 나타난다. 그 실패는 엄중하다. 인명의 희생,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의 상실이 닥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