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2.28 11:01
구한말에 촬영한 운종가, 즉 지금의 종로 거리 모습이다. 종로는 예로부터 시장이 발달해 사람의 왕래와 물자의 이동이 빈번했던 곳이다. <한국 콘텐츠진흥원>

 

“외로울 때면 생각하세요, 아름다운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잊을 수 없는 옛날을 찾아 나 이렇게 불빛 속을 헤맨답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몰래 발길이 멈추는 것은, 지울 수가 없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가슴에 남겨둔 까닭이겠죠, 아~아~아~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7080의 가요에 등장하는 노랫말이다. 가요의 제목은 ‘이 거리를 생각하세요’, 가수는 장은아다. “잊을 수 없는 옛날을 찾아 나 이렇게 불빛 속을 헤맨답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가슴에 와 닿는다. 아름다운 노래이면서, 마음을 저려오게 만든다. 그렇게 가슴속에 남은 사람과의 추억을 찾아 헤맬 수 있는 거리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종로(鐘路)는 적어도 내게는, 그리고 필자와 비슷한 연령의 7080 세대 사람에게는 그런 아름다운 거리다. 책방이 많았고, 학원도 즐비했다. 들어가 빵을 시켜먹으며 옆 테이블의 단발머리 여중고생을 훔쳐본 기억이 있던 제과점, 이상하리만치 입맛을 자극했던 쫄면을 팔았던 분식집도 많았다.

어느덧 훌쩍 지나버린 세월의 흔적을 찾아 요즘도 종로 거리를 거닐 때가 있다. 그만큼 아름다운 서울 속에서 그에 못지않은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거리가 바로 종로다. 여전히 사람의 발길이 물결처럼 이어지고, 많은 상점이 화려하게 단장한 채 손님을 부른다.

종로의 명칭은 이곳에 시간을 알리는 종루(鐘樓)가 있어서 얻은 것으로 보인다. 종로3가역 동쪽으로 다음 역이 바로 종각(鐘閣)이고, 이곳은 밤에는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과 새벽엔 그 해제를 알리는 파루(罷漏)의 종소리가 흘렀다. 그래서 얻어진 이름이 종로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세종로 청계천 머리에서 동대문까지의 구간이다.

종로의 다른 이름은 운종가(雲從街)다. 구름(雲)이 몰려드는(從) 것처럼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이 雲從(운종)이라는 말은 중국 고전인 <시경(詩經)>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으니, ‘족보’를 갖춘 단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원문은 “제자귀지 기종여운(齊子歸止, 其從如雲)”이다.

문강(文姜)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옛 춘추시대 제(齊)나라 사람이니,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도 훨씬 전의 인물이다. 그러나 음탕했던 모양이다. 제나라에서 이웃인 노(魯)나라에 시집을 가놓고서는 귀국할 때마다 이복형제인 제나라 임금과 ‘바람’을 피웠으니 말이다. <시경> 원문에 등장하는 그 구절은 문강(齊子)이 귀국할 때, 혹은 어쩌면 저의 시집인 노나라에 돌아갈 때를 일컬었던 듯하다. 그때 문강의 뒤를 따랐던 시종(侍從)들이 많아 구름과 같았다는 표현이다.

<시경>에서 유래한 이 말은 그 뒤로도 줄곧 쓰였다. 역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든다’는 뜻으로 말이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운집(雲集)’이라고도 적는다. 비가 내리기 전 하늘을 보면 이 단어가 매우 생동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큰 비가 오려할 때 저 먼 하늘에서 새카맣게 모여드는 그런 구름을 떠올리면 좋다.

옛 조선에서의 서울은 경복궁과 광화문에서 세종로로 이어지는 축이 정치적 근간을 형성했다. 왕조의 핵심 권력이 자리를 틀고 있는 왕의 보금자리, 즉 경복궁과 광화문을 중심으로 세종로 좌우에 펼쳐져 있던 각 정부부처인 육조(六曹)를 봐서 그렇다. 그로부터 서쪽으로 앉은 거리가 바로 종로다.

이 종로는 육의전(六矣廛)으로 유명하다. 이는 수도에 세워진 시장과 점포라고 해서 일명 경시전(京市廛)으로도 적었다. 대개 세금을 부담하는 공식 시장 또는 점포로서 여섯 가지의 물품을 주로 팔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 종류는 우선 비단을 파는 선전(線廛), 옷감인 무명을 파는 면포전(綿布廛), 솜과 비단을 파는 면주전(綿紬廛), 종이를 파는 지전(紙廛), 모시와 베를 파는 저포전(苧布廛), 생선을 파는 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들은 정부에 세금을 내면서 장사를 했던 점포들이다. 세금을 내는 대신 정부로부터 전매(專賣)의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이것을 옛날에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고 했다. 난전(亂廛)을 금지하는(禁) 권한(權)이라는 뜻이다. ‘난전’은 공식 허가를 받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는 무허가 상인 혹은 가게와 점포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육의전의 상인들은 옆에 무허가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을 단속해 영업을 못 하도록 하는 권한이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 중초반기에 이미 서울 종로 거리에 이런 육의전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종로는 이 같은 육의전 상인들의 활발한 영업행위로 이미 그때 ‘雲從街(운종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분위기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공식적인 시장이니 물건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고,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종로 거리는 늘 붐볐다는 말이다.

원래는 더 넓었던 거리가 상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많이 좁혀졌다고 한다. 지금도 늘 그렇지만,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보다는 상업적인 곳에 사람이 더 많이 몰린다. 서울 명동과 종로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물결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지지만, 광화문과 여의도 국회 앞은 비교적 썰렁하다.

아무튼 종로는 조선시대 수도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고 한다. 육의전에 가끔 난전이 들어서면서 각종 물품의 공급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으니 사람들이 항상 북적거렸다. 그런 번화한 곳에 높은 벼슬아치가 등장하면 어떨까. 옛 조선의 예법대로라면 많은 일반 사람들은 그들 벼슬아치의 행렬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게 싫었을 법하다. 그래서 종로에는 피맛골(避馬골)이 생겨났다. 말(馬)을 피하기(避) 위해 만든 골목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세종로의 종로 입구에서 종로3가까지 내려오는 종로 거리 피맛골은 많이 없어졌다. 도심 재개발을 추진하다보니 옛 정취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도 종로3가부터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에는 피맛골이 제법 남아 있다. 닭볶음탕, 해삼과 멍게, 각종 찌개 등을 파는 조그만 음식점들이 그런 피맛골에서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다.

7080 세대 앞의 세대에게 이 종로3가는 ‘종삼’으로 불렸다. 술집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퇴근길에 소주 한잔 기울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탑골공원(옛 파고다공원) 주변에는 아직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옛 전성기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서울에서 종로를 압도하는 상권(商圈)이 워낙 많이 생겼고, 그에 따라 사람들도 이리저리 흩어졌기 때문이다.

세월은 역시 많은 것을 흩트리는가 보다. 그럼에도 종로는 여전히 아름답다. 옛 추억을 찾아 불빛 속을 헤매면서 세월에 묻혀 지나가버린 아름다운 이들을 떠올리기에는 아주 그럴싸한 곳이 종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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