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1.06 09:00
<삼국지연의> 속 대표적 인물인 관우(關羽)를 신앙의 대상으로 모신 사당 동묘의 모습이다. 관우와 그의 주변 인물 조각상이 있다. 임진왜란 때 출병했던 명나라 장병들을 위해 지은 건축이다. 사진 제공-종로구청.

동묘는 우선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준말이다. 동쪽(東)의 관왕(關王)을 모신 사당(廟)이라는 뜻이다. 이 관왕(關王)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인물이다. 유비(劉備)와 의형제를 맺은 뒤 활약했던 그의 장수 관우(關羽)다. 그가 왜 신으로 모셔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제법 잘 알려져 있다.

우선 중국의 신앙이 드러내는 특징 때문이다. 고래로부터 중국은 현세(現世)에서 강한 힘을 행사했던 인물은 죽어서도 힘과 권력을 지닌다고 믿어왔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이 關羽(관우)다. 그는 충성과 의리의 인물이면서도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시공간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였다고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런 關羽(관우)는 북송 때 황제의 꿈에 나타나 당시 조정의 골칫거리였던 사안을 해결하는 주역으로 등장했다. 마침 그 황제의 꿈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이어 왕조의 차원에서 그는 처음 신으로 대접을 받았고, 뒤를 이은 왕조에서도 몸값이 올라 지속적인 명예를 누렸다.

아울러 그는 중국 산시(山西) 남부가 고향인데, 그곳 사람들이 내륙 소금 판매업을 석권하면서 돈을 잘 벌어들인 적이 있었다. 그 고향의 후배들은 먼 곳을 이동할 때 반드시 자신을 지켜달라는 의미에서 무예가 출중했던 고향선배 關羽(관우)의 조각상을 모시고 다녔다고 한다. 다른 지역 상인들이 그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조각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낸 다른 지역 상인들은 무릎을 쳤다. ‘아, 저 지역 사람들이 關羽(관우) 때문에 돈을 잘 버는구나!’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關羽(관우)는 왕조가 떠받들어 모시는 무력의 신에서 ‘타이틀’ 하나를 더 얻었다. 이번에는 돈을 잘 벌게 해 주는 재물신의 타이틀이었다.

돈 버는 일은 누구나 다 좋아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關羽(관우)는 생명을 지켜주고 돈을 벌게 해주는 신으로 인기가 높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출동한 명나라 장수나 사병들에게도 당연히 그의 인기가 최고였을 것이다.

그들의 출병에 고마움을 넘어 ‘우리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再造之恩)’라고 떠받들며 감격에 겨워하던 조선의 조정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이 바로 이 東關王廟(동관왕묘), 즉 東廟(동묘)다. 조선에 와 있던 명나라 장병들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있었고, 멀리 베이징(北京)에 있는 명나라 황제와 대신들에게도 ‘우리가 이만큼 신경 쓰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데 필요했을 것이다.

이 동묘의 문화재적 가치는 상당하다고 한다. 당시 중국의 민속(民俗)을 한반도의 조선이 어떻게 해석해 형상화했는지를 알 수 있고, 건축과 조각에서 예술적 조영(造營) 능력이 어땠는지 등을 두루 살필 수 있다고 해서다. 그러나 關羽(관우)가 어디까지나 중국인 마음속의 신앙 대상일 뿐이어서 다소 생경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는 점도 사실이다.

東廟(동묘)의 앞 글자 東(동)은 앞의 동대문역에서 살폈으니 다음 글자 廟(묘)를 보기로 하자. 廟(묘)는 일반적으로 조상이나 신앙의 대상인 신을 모시는 일종의 사당(祠堂)이다. 아울러 중국의 보통 쓰임새에서는 외래 종교인 불교 외의 토속 신앙의 신을 모시는 곳으로 정의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토속 신앙인 토지신(土地神) 숭배가 많았는데, 그를 모시는 곳에 늘 廟(묘)가 붙었다.

태묘(太廟)는 권력의 정점이었던 황제(皇帝)의 신위(神位)를 두는 곳이고, 그 아래의 대신들도 등급에 따라 각자 가묘(家廟)를 지었다고 한다. 공자(孔子)의 신위를 모시는 곳은 공묘(孔廟)라고 했으며, 그가 문무(文武)의 영역에서 文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문묘(文廟)라고도 불렀다. 關羽(관우)는 孔子(공자)에 견줘 武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무묘(武廟), 또는 관묘(關廟)나 관제묘(關帝廟)라고 했다.

중국 재래 종교에 해당하는 도교(道敎)의 도사(道師)들이 이곳을 활용해 이제 때로는 도교 사원의 이름으로도 쓰인다. 아울러 불교의 사원(寺院)과 혼용해 종교적인 행사가 치러지는 곳의 일반적인 명칭인 사묘(寺廟)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우리의 경우에는 종묘(宗廟)가 대표적이다. 조선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왕조 최고 권력자인 임금의 조상들 신위가 있는 곳이니 이곳은 신성(神聖)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아울러 토지와 농사의 신을 모신 곳이 사직(社稷)이다. 이 둘을 합치면 종묘사직(宗廟社稷)인데, 이는 곧 왕조의 얼굴이나 근간을 이룬 곳으로 간주했다. 지금 식으로는 국가의 상징인 셈이다.

묘당(廟堂)이라는 말도 기억해두면 좋다. 황제의 신위를 모셔둔 태묘의 정전(正殿) 또는 그와 같은 새김의 핵심 건축물인 명당(明堂)을 일컫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일을 의논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국정을 의논하는 곳’, 즉 조정(朝廷)이라는 의미를 얻었다.

묘산(廟算)은 그런 묘당에서 논의를 거듭해 다듬고 또 다듬는 전략(戰略)을 가리킨다. 병법(兵法)에서 나온 개념이다. 그 廟算(묘산)을 거듭하고 또 거듭해 상대를 제압하는 가능성을 높이면 그게 바로 승산(勝算)이다. “승산이 있을까 없을까”라며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지만, 그 속내는 이렇듯 조금 다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혹심하게 거쳤던 조선의 조정은 그런 廟算(묘산)에서 실패했다. 그보다 작은 단위였으나 자신의 전쟁터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廟算(묘산)에 열중했던 이순신 장군은 왜병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전략의 유무(有無), 그를 다루는 깊이와 진지함의 차이에서 비롯했던 결과다.

국가를 이끌었던 조선의 廟堂(묘당)과 朝廷(조정)은 그런 전략 자체를 갖추지 못해 커다란 재앙을 불러들였고 결국 명나라에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 과정 뒤에 생겨난 게 바로 이 東廟(동묘)다. 우리는 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東廟(동묘)를 지날 때면 늘 머릿속을 오가는 상념이다.

<지하철 한자 여행 1호선>, 유광종 저, 책밭, 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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