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이효영기자
  • 입력 2016.01.07 09:30

세계 경제 침체, 내수 시장 부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여파에 따른 관광객 감소 등 지난해 불거진 각종 악재 속에서도 한국 화장품 산업은 유례없는 호황을 기록했다. 한국 화장품 산업은 역사가 70년에 불과하지만 화장품 강국으로 불리던 일본을 대신해 중화권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시장에서 화장품 맹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또다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쓰기 위해 아시아를 넘어서 미국과 유럽 등 화장품 본고장에도 속속 깃발을 꽂고 있다.

올해 화장품업계는 한류 열풍이 사그라들기 전에 기술력  및 프리미엄 이미지 구축을 통해 해외 영토 넓히기에 발빠른 행보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수출효자 산업 K뷰티, 지난해 ‘유례없는 호황’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 중국 창사 왕푸징 매장. 사진=아모레퍼시픽

중국을 비롯한 해외 소비자들은 한국 드라마 속 여배우들의 미모가 한국 화장품 덕택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을 정도로 K뷰티 산업은 K팝 K드라마 등 한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지난해 한국 화장품은 수출 효자 품목으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화장품 품목 수출액은 23억4921만달러로 2014년 같은 기간보다 57.3%나 증가했다. 화장품 무역수지도 2014년 5월 흑자로 돌아선 이래 18개월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K뷰티 열풍의 진원지인 중국에서는 지난 2014년까지 수입 화장품 시장에서 프랑스, 일본, 미국에 이어 4위였던 한국이 지난해 2위로 뛰어올랐다.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는 2015년 단일 브랜드 최초로 연 매출 1조원을 넘어섰다. 단일 브랜드 1조 돌파는 국내 패션과 뷰티 브랜드를 통틀어 사상 처음으로 이뤄낸 쾌거다. 설화수의 성공 비결은 인삼 등의 한방 원료에 현대 피부과학 기술을 접목시킨 연구개발로 차별화된 품질력을 갖추면서 럭셔리 화장품으로 자리잡은 덕분이다.

국내 업계 2위인 LG생활건강은 중국 시장에서 고급 한방화장품 브랜드 ‘후’의 VIP마케팅이 성과를 내면서 매출이 2배이상 급성장했다. 특히 LG생활건강의 수출 판매 1위 제품인 ‘후 비첩 자생 에센스’는 일명 ‘이영애 에센스’로 유명세를 타면서 한방화장품 선호도가 높은 아시아 여심 공략에 성공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은 지난해 창립 70주년을 맞아 설화수 등 5대 브랜드를 필두로 한 질적 성장과 해외시장 확대에 박차를 가해 오는 2020년 매출을 12조원으로 끌어올리고 이 가운데 글로벌 사업 비중을 50% 이상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아모레퍼시픽은 올해 중동, 내년에 중남미 시장에 차례로 진출할 예정이다. 또 해외 시장 진출 시 인구 1000만명이 넘는 전세계 30여개 글로벌 메가시티를 집중 공략할 방침이다. 중화권 시장이 어느 정도 다져졌다고 판단한 LG생활건강은 올해 고급화 전략으로 선진국 시장 및 동남아 등을 더욱 파고들 계획이다.

LG생활건강의 '후' 브랜드 모델인 이영애. 사진=LG생활건강

◆중견·중소 화장품업체도 K뷰티 열풍 합류

중견·중소 화장품업체들도 포화 상태인 국내에서 벗어나 해외 시장으로 급속히 눈을 돌린 결과 K뷰티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 잇츠스킨의 ‘달팽이크림’은 중국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매출이 1700억원대에 이르는 등 이른바 대박이 났다. 잇츠스킨은 중국에서의 급성장에 힘입어 러시아, 미주, 동남아 등 현재 22개국에 진출했으며 2015년말 국내 증시에 상장했다. 토니모리, 네이처리퍼블릭 등도 중국·동남아권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지난해 줄줄이 기업공개를 실시했다.

이들 중소 브랜드는 해외 유수 브랜드들이 포진한 미국 시장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다.

토니모리는 지난해 6월 뉴욕에 미국 첫 플래그십스토어를 오픈한 이래 샌프란시스코, 애틀랜타 등 미주 시장 선점에 나섰다. 네이처리퍼블릭도 미국 LA 윌셔로드에 미국 11호점을 냈고 미샤는 홍콩 침사추이 매장에 이어 유엔롱 플라자에 매장을 오픈했다. 세계 1위 럭셔리기업 LVMH그룹이 운영하는 글로벌 화장품 편집매장인 ‘세포라’ 뉴욕 맨해튼점에는 현재 토니모리와 닥터자르트 등 국내 중저가 화장품 브랜드 10여개가 입점해 있다.

잇츠스킨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매장. 사진=잇츠스킨

◆화장품에 빠진 한국 기업들...“돈된다” 너도나도 쏠림현상

패션, 외식, 엔터테인먼트, 악기 등 전혀 다른 업종에서 입지를 다져온 국내 기업들이 너도나도 화장품 사업을 ‘돈이 되는’ 신성장동력으로 주목하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해말 세계 1위 화장품 제조사인 인터코스와 합작회사를 설립, 본격적인 화장품 생산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미스터피자로 알려진 MPK그룹은 지난해 10월 화장품 기업 한강인터트레이드의 지분 80%를 228억원에 인수했다. MPK 관계자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위해 화장품 회사를 인수했다”며 “피자와 화장품이 젊은 여성 고객층에 동시 마케팅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한류 스타’를 보유한 엔터테인먼트 업계도 가세했다. YG엔터테인먼트는 지난 2014년 화장품 브랜드 ‘문샷’을 론칭했고 키이스트도 SD생명공학 지분을 확보해 화장품 사업에 나섰다.

소셜커머스 티켓몬스터는 마스크팩 전문회사 제닉과 손잡고 지난해 말 마스크팩 브랜드인 '티젠'을 내놨다. 창립 70여년간 도자기 사업에만 주력해온 행남자기는 의료기 전문 제조업체에 투자해 의료기와 화장품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밖에 건설기업인 신안, IT화학소재 기업 솔브레인, 로만손의 제이에스티나, SPA(제조 판매 일괄형) 의류 브랜드 LAP, 삼익악기, 천호식품 등도 화장품 사업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 업체가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화장품 사업이 등록제인데다 한국콜마·코스맥스 등 탄탄한 기술력을 가진 제조업체들이 있어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ODM(제조자개발생산) 방식을 택할 경우 진출이 손쉽다. 식약처에 따르면 국내 화장품 제조 및 판매업체는 지난 2012년부터 올해까지 연 평균 2,000여개씩 늘어나 관련 업체 수가 무려 8,40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기술 투자 없이 편승할 경우 후폭풍 우려 

하지만 성장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제조가 아닌 판매 유통업체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높다. 급하게 먹은 밥이 체하듯 고속 성장의 후폭풍이 거셀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당수 업체들이 OEM, ODM 업체들에 의존하고 유통만 하는 낮은 진입장벽이 결국 업계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지적이 높다. 기술력을 동반한 신시장 개척이 아니라 ‘돈되는 장사’라는 기대만으로 K-뷰티 열풍에 편승하려다 보면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하는 사례가 속출할 수 있다는 것. 특히 일부 제품이나 업체를 제외하고는 대단한 특허 기술이 아닌 만큼 중국 업체들의 짝퉁 공세에 이어 기술력을 쫓아오게 될 경우 머지않아 시장을 빼앗아갈 가능성도 높다.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화장품 산업도 중국 현지 기업들의 기술력과 품질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어 중국 로컬 기업들의 역습이 현실화되고 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중국 화장품 시장에서 글로벌 기업이 약 90% 이상을 차지했지만 최근에는 50억 위안 이상 판매하는 중국 로컬 브랜드가 늘고 있다.

한 화장품 업체 관계자는 “제조업 성장이 둔화되면서 한계에 부딪힌 많은 기업들이 막연한 기대만으로 화장품 사업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며 “업체 수가 급증하고 경쟁도 치열해진 만큼 차별화된 기술력과 마케팅 없이는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업체 관계자는 “비슷한 제품을 쏟아내다 공멸로 갈 수도 있다”며 “시장 규모가 커지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새로운 가치 창출 없이 덩치만 키우는 것이 아닌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올해 한·중 FTA는 위기이자 기회

올해부터 중국을 비롯해 베트남, 뉴질랜드 등 3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이 공식 발효되면서 화장품 업계의 전망은 밝은 편이다. 더욱이 한국화장품이 중국 시장에서 고성장하고 있다지만 아직 시장점유율이 2% 정도에 그치고 있어 여전히 성장잠재력은 높다. 또 동남아 시장이나 유럽 미국 등 선진국 시장 진출 움직임도 활발하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대한화장품협회 66회 정기총회에서 대한화장품협회장인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의 지적대로 한중 FTA는 국내 화장품 업계에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하다. 서 회장의 발언은 최대 수출대상국인 중국 경제 성장률 저하에 대한 경고인 동시에 한중 FTA 발효 이후 중국 정부의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한 규제 강화를 우려하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한중 FTA 합의 이후 중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화장품 관련 규제를 강화해 왔다. 무엇보다 중국에 화장품을 수출하려면 중국위생허가(CFDA)를 받아야 한다. CFDA를 받기 위해서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이 걸릴 수 있는데다 비용도 만만찮게 드는 등 중국의 비관세 장벽이 높기 때문에 중국에 제조 공장을 세우고 완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큰 문제가 없지만 유통 위주로 영업해온 중소업체의 경우 중국 리스크가 커진 셈이다.

오히려 한중 FTA로 저가 중국 제품들이 한국에 진출하거나 중국의 거대 자본이 한국 시장에 진출해 국내 화장품 내수를 장악할 수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중국 샤오미가 출범 4년만에 세계 3위 휴대폰 기업으로 올라선 것처럼 이미 중국 내수 시장에서 매출 상위 10개사 가운데 중국 로컬 기업이 3개나 이름을 올린 화장품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 화장품이 7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며 100년이 넘는 세계 유명 브랜드들과 어깨를 겨루는 것처럼 중국이 기술과 자본력으로 한국 화장품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다는 점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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