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1.11 17:33
하얀 눈밭 속에 이리저리 찍힌 고니의 발자국을 그린 중국의 그림이다. 어지러이 찍힌 그 발자국처럼 정처없이 세월에 떠밀려 흘러가는 인생을 표현했다.

예전 중앙일보 재직 때 지면에 소개했던 글이다. 기러기를 가리키는 鴻(홍), 발톱 등을 지칭하는 爪(조)의 붙임이다. 어려워 보이는 한자 단어지만, 함의는 깊다. 새해의 초입에 들어선 우리의 마음을 그에 견주며 글 내용을 조금 고쳐 다시 싣는다.

시간이 또 하나의 길목을 지났다. 음력으로 우리가 맞이하는 설이 곧 닥치고, 이제는 서력(西曆)으로 2015년을 넘겨 2016년을 맞았다. 물 흐르듯 지나가는 게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간이 갈마드는 길목에 들어서면 왠지 우울하면서도 설렌다.

국어사전에도 이 ‘홍조(鴻爪)’라는 단어가 올라 있다. ‘기러기가 눈밭이나 진흙 위에 남긴 발자국’으로 풀이하는 말이다. 좀 더 풀자면 그렇게 덧없이 찍혀 있는 발자국처럼 곧 스러져 없어질 기억이나 흔적을 뜻한다. 바로 인생(人生)의 모습이 그렇다고 해서 사전에 올린 단어다.

삶이 궁극에는 허무(虛無)하고 무상(無常)하다는 점은 제 각성(覺醒)의 힘을 지니고 삶을 살아본 청장년(靑壯年) 이상의 사람이면 다 눈치 챌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기러기가 남긴 발자국에서 인생의 허무함만을 느낀다면 어딘가 조금은 개운치 않다.

그 단어를 만든 주인공은 북송(北宋)의 최고 문인 소식(蘇軾 소동파)이다. 그가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수 년 전 과거를 보러 나선 길에 머물렀던 절을 다시 지나치다가 동생을 그리워하며 적은 시(詩)에 등장한다.

“인생이 여기저기 떠도는 것 무엇 같을까?/ 응당 기러기가 눈 진흙 밟는 것 같겠지/ 진흙 위에 우연히 발톱 자국 나겠지만/ 기러기 날아가면 동쪽 서쪽 따지겠는가? (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중국시가선>, 지영재 편역, 을유문화사)

예서 나온 성어가 ‘雪泥鴻爪(설니홍조)’다. 눈 쌓인 진흙탕 위에 어지러이 찍혀 있는 기러기의 발자국, 그리고 그들이 날아간 뒤에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 마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실(消失)과 망각(忘却)으로 향하는 인생을 이야기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맺어진다. “지난날 험한 산골길 아직 기억하는가?/ 길 멀어 사람 지치고 당나귀 울었었지(往日崎嶇還記否, 路長人困蹇驢嘶).”(상동)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인생이지만, 그래도 그의 눈과 귀에 들어온 것은 ‘길을 나선 사람과 당나귀의 긴 울음소리’다. 시인은 궁극적인 메시지를 여기에 담았다고 보인다. 세월의 무상함을 견디면서 꿋꿋이 일어나 길을 나서려는 사람의 의연(毅然)함이다.

그래서 ‘설니홍조(雪泥鴻爪)’라는 성어를 무상과 허무로 풀면 50점, 그럼에도 꿋꿋이 길을 나서는 사람의 의지로 정확하게 풀면 100점이다. 다가온 새 해, 인생의 답안지에 모두 만점(滿點) 그으시기 바란다.

커다란 새, 고니를 가리키기도 하는 鴻(홍)이라는 글자에 福(복)을 붙이면 鴻福(홍복). 커다란 복을 지칭하는 洪福(홍복)과 동의어다. 꿋꿋하게 나서는 새해의 인생길에 커다란 복까지 함께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지니, 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 모두 그런 새해 맞으시기를 축원한다.

 

<한자 풀이>

鴻 (기러기 홍, 원기 홍): 기러기, 큰기러기. 큰물, 홍수. 원기(元氣). 성(姓)의 하나. 크다. 넓다. 성하다, 번성하다. 굳세다, 강하다. 같다, 같게 하다.

爪 (손톱 조): 손톱. 갈퀴. 긁다, 할퀴다. (손톱, 발톱을)자르다. 움켜잡다. 돕고 지키다.

泥 (진흙 니, 진흙 이, 물들일 녈, 물들일 열): 진흙, 더러운 흙. 진창. 수렁. 벌레 이름. 야드르르한 모양. 윤기 도는 모양. 이슬에 젖은 모양. 약하다. 칠하다, 바르다.

蹇 (절뚝발이 건): 절뚝발이. 다리를 저는 당나귀. 노둔한 말. 괘 이름. 굼뜨다. 걷다. 머무르다. 고생하다.

 

<중국어&성어>

雪泥鸿(鴻)爪 xuě ní hóng zhǎo: 본문 참조.

白云苍(蒼)狗 bái yún cāng gǒu: 하늘에 뜬 흰 구름(白雲)이 갑자기 회백색의 개(蒼狗)의 모습으로 바뀌는 일. 앞의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국과 같은 뜻. 무상(無常)한 자연의 현상, 사람의 세상 등을 가리키는 성어.

变(變)化无(無)常 biàn huà wú cháng: 늘 바뀌어서 고정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는 일, 또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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