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1.21 18:12

 

춘추시대 월나라 구천을 도와 오나라 왕 부차를 꺾었던 유명한 책사 범려의 상. 상상으로 그린 인물화다. 그는 나아갈 때 못지않게 물러설 때를 제대로 짚었던 지혜의 대명사다.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 구천(勾踐)을 도와 오(吳)를 꺾는 데 성공한 사람의 하나가 범려(范蠡 BC536~BC448 추정)다. 그는 중국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 중에서도 지혜가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런 그가 월나라 왕 구천과 함께 오나라를 제압했을 때 보인 행동이 이채롭다.

그는 숨어 지내는 길을 택했다. 오나라를 무찌르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따라서 일등공신의 자리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 서시(西施)와 함께 강호(江湖)로 숨어들어 이름을 바꾼 뒤 상인으로서 거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구천의 사람됨을 믿지 못했다. 함께 어려운 시절을 겪을 수는 있으나 성공을 거둔 뒤에 그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달콤한 유혹을 모두 끊고 강호에 몸을 맡긴다. 그런 그의 행동을 두고 중국인들은 거센 물길에서 용감하게 물러난다는 뜻의 ‘급류용퇴(急流勇退 혹은 激流勇退)’라는 표현을 쓴다.

그냥 물러나면 물러나는 것인데, 왜 하필이면 용기라는 의미의 ‘용(勇)’을 붙였을까. 그 용의 본질은 ‘과단(果斷)’에 있다. 이 과단이 무엇인가. 열매를 뜻하는 果(과)와 단호히 끊는다는 뜻의 斷(단)이 붙었다. 앞의 果(과)는 ‘열매’ ‘과실’의 새김에서 발전해 ‘단단하게 맺어진 상태’의 의미까지 얻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果斷(과단)’은 ‘과감하게 끊어 버리다’의 뜻이다.

사실 물러나는 일이 더 어렵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감성체인 사람은 그로부터 다시 번지는 수많은 욕망에 눈과 마음이 쉽게 어두워진다. 따라서 그런 욕망을 끊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물러남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굳이 ‘勇退(용퇴)’라고 적었을 테다.

나아가고 물러남은 모두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때를 맞추지 못하면 실패한다.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이름은 이름대로 무너진다. 이를 중국에서는 ‘身敗名裂(신패명렬)’이라고 적는다. 늑대가 웅크렸던 자리처럼 이름이 볼썽사납게 망가진다는 뜻에서 ‘聲名狼藉(성명낭자)’라고 표현키도 하며, 냄새나는 이름이 멀리 퍼진다고 해서 ‘臭名遠揚(취명원양)’이라고도 적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이 화제다. 기업 등으로부터 거둔 돈이 많을 것이라고 해서 매긴 추징금이 2000억 원 이상이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은 이를 끝까지 내지 않고 버티다가 급기야 가택 등을 수색 당했다. 자신에게 밀려오는 급류를 보면서 깨끗하게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이 몰고 온 정국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권력을 잡은, 나름대로 의 ‘勇(용)’을 펼친 인물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그 담력은 어찌 보면 작은 용기, 즉 ‘소용(小勇)’이리라. 국가의 전직 원수로서 자신과 가족, 나아가 국가의 명예까지 생각해 과거의 허물을 터는 큰 용기, ‘대용(大勇)’은 그에게 없었던 모양이다.

 

<한자 풀이>

急(급할 급): 급하다, 빠르다, 재촉하다 등의 새김이다. 급행(急行)은 자주 쓰는 단어. 급절(急切)이라고 적으면 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뜻한다.

流(흐를 류): 물길의 흐름을 지칭한다. 퍼지다, 번지다, 전해지다 등의 뜻도 있다.

果(열매 과): 식물이 맺는 열매의 뜻. 단단하게 굳어지는 상황을 의미해 과감(果敢)이라는 뜻도 얻었다. ‘과연 그럴까?’의 과연(果然)이라는 새김도 있다.

斷(끊을 단): 결단(決斷)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인다. ‘단호(斷乎)함’은 확실하게 끊는 동작의 형용.

勇(용기 용): 두려움이 적은 사람에게 따라붙는 글자다. 과감하며 주저하지 않으며, 주눅이 들지 않는 사람의 성격.

급류용퇴(急流勇退): 거센 물길 앞에서 용기 있게 물러나는 일. 중국 성어지만, 우리말에서도 쓰인다.

臭(냄새 취, 맡을 후): 보통은 나쁜 냄새다. 구린내 정도로 이해하면 좋다.

 

<중국어& 성어>

急流勇退 jí liú yǒng tuì 뜻은 위와 같다. 激流勇退 jī liú yǒng tuì라고도 한다.

身敗名裂(身败名裂) shēn bài míng liè 몸이 망가지는 게 身敗, 이름이 이리저리 찢기는 게 名裂. 몸이나 이름(사실은 명예다) 중 하나라도 건지면 OK. 둘 다 건지면 ‘짱~’. 그 둘 모두 놓치면 비참해진다.

聲名狼藉(声名狼藉) shēng míng láng jí 聲名은 곧 명예 또는 이름을 가리킨다. ‘狼藉’는 늑대의 굴 속 녀석들이 머물렀던 자리에 관한 형용이다. 나무 가지 등을 모아놓은 그 자리에 늑대가 머물렀다 사라지면 형편없이 엉클어진다. 그런 상태를 이름이다. ‘유혈(流血)이 낭자하다’라는 우리말 표현에도 등장한다. 끝 글자 藉의 독음에 주의하자.

臭名遠揚(臭名远扬) chòu míng yuǎn yáng 나쁜 냄새 나는 이름이 멀리 퍼진다의 뜻. 臭 chòu는 중국어에서 아주 고약하게 쓰이는 글자다.

范蠡 fàn lǐ: 그의 생애는 워낙 유명하다. 정계에서 물러나 뛰어난 지혜로 돈을 많이 벌어 중국인에게 재물 신으로까지 추앙을 받는다. 바꾼 이름이 陶朱라 해서 흔히들 ‘陶朱公’이라고도 적는다. 음식점이나 상점 등의 가게 명칭에서 이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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