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1.25 15:43
듣지 않으며, 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런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 청문회는 우리 국회에서 늘 열리지만 말해도 들을 생각 없다는 식의 태도가 국회의원에 의해 자주 드러난다.

듣고 보는 행위를 한자로 표현하면 시청(視聽)이다. 같은 의미의 또 다른 한자 단어는 견문(見聞)이다. 둘 모두 듣고 보는 동작을 일컫는 한자 단어다. 그러나 새김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있다. 앞에 나오는 ‘시청(視聽)’은 듣고 보는 동작에 관한 직접적 표현이다. 뒤의 ‘견문(見聞)’은 듣고 보는 ‘시청’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는 행위에 관한 표현이다.

예를 들자면 그저 보고 듣기만 할 뿐 제대로 그 정보의 의미 등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건성으로 보고 듣는다는 얘기다. 이럴 때 쓰는 성어가 ‘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이불문(聽而不聞)’이다. 보되(視而) 제대로 안 보며(不見), 듣되(聽而) 제대로 듣지 않는(不聞) 사람의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단순히 보고 듣는 동작 ‘시청’은 제대로 보고 듣는 ‘견문’과 다소 차이가 있다.

유교의 경전인 <예기(禮記)>의 해석에 따르자면 그렇다. 조금 더 부연할 필요가 있다. 보고 듣는 행위는 결국 올바른 지식을 쌓기 위함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분노가 있거나, 좋고 싫음 또는 걱정과 근심, 나아가 두려움 등이 있으면 그에 이르지 못한다. 감각기관의 기능만 작동할 뿐 진정한 보고 들음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제대로 보고 듣는 ‘견문(見聞)’이라는 단어가 한편으로는 옳게 쌓은 ‘지식’이라는 의미를 획득하는 이유다. 그러니 <예기>의 해석에 따른다면 건성으로, 때로는 제 이익만을 위해 바른 태도를 지니지 않고 보고 듣는 일이 ‘시청’이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진지하게 상대를 관찰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임이 ‘견문’이다.

매번 변죽만 요란하게 울리다가 흐지부지 끝을 맺는 대한민국 여의도 국회의 청문회. 이번 ‘국정원 요원 댓글’ 사건을 두고 벌인 국정조사 청문회도 같은 꼴의 무기력한 반복이었다. 사람 불러다 놓고 제 당파적 입장에 따라 열심히 보고 듣는 척 했지만, 역시 실체적 진실에 전혀 다가서지 못했다.

제대로 듣겠다고 한 자리에 모인다 해서 붙인 이름이 청문회(聽聞會)겠으나, 이럴 바에는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다. 듣되 제대로 듣지 못하는 모임, ‘청이불문회(聽而不聞會)’가 어떨까. 조금 길어 외우기 어렵다면, 듣고서도 오히려 귀먹는다는 의미로 ‘청롱회(聽聾會)’는 어떨까. 아무튼 갈수록 기가 막히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의 대한민국 국회다.

 

<한자 풀이>

視(볼 시): 보다, 보이다, 엿보다, 간주하다 등의 새김이다.

見(볼 견): 역시 위의 글자와 비슷한 새김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설명한 차이가 있다.

聽(들을 청): 듣다, 들어주다, 판단하다 등의 뜻.

聞(들을 문): 역시 위 글자의 새김과 비슷하다. 그러나 깨우치다의 새김이 있다.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잘 들어서 제 마음속으로 새기는 행위다. 냄새 등을 맡는다는 동작을 표현할 때도 있다.

聾 귀먹을 롱(농):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 귀먹다. 캄캄하다의 의미도 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면 어리석어진다. 따라서 무지하다, 우매하다의 새김도 얻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인을 이를 때도 쓰인다.

 

<중국어&성어>

视(視)而不见(見),听(聽)而不闻(聞) shì ér bù jiàn,tīng ér bù wén: 중국에서는 쓰임새가 많은 성어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유교 경전인 『예기』에 나오는 말이다. 사실은 그 앞에 적힌 성어가 하나 더 있다. ‘心不在焉’이다. 중국어로는 xīn bù zài yān으로 발음한다. ‘이미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떠나 있으니 보되 제대로 볼 수 없고, 듣되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얘기다. 이미 싸늘하게 식은 연인의 마음을 표현할 때 이 성어는 자주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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