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2.01 18:45
이호영 철학박사(런던대)
할리우드 서부영화는 대개가 이렇게 펼쳐진다. 온갖 악랄한 짓을 하던 나쁜 놈은 착한 보안관과 대결하다 죽고, 보안관은 미녀까지 차지한다. 이른바 ‘승자독식’의 장엄한 결론이다. 하지만 영화 아닌 실제의 세계는 다르다. 정의를 구현하는 용사의 세계에 생각지 못했던 ‘치사한 놈’이 슬그머니 들어오면서 정의는 곧 허망해진다.

정의가 최고였던 세상에 ‘알고 보면’이라는 ‘사연’이 슬쩍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알고 보니’ 보안관은 마약상에게 뇌물을 받는 타락한 경찰이었더라. ‘알고 보니’ 악당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웃이었으며, ‘알고 보니’ 치사한 놈은 좋은 친구였더라는 식이다.

정의와 악이 맞서는 세상에선 우리는 정의의 사도이고 상대는 꼭 악당이어야 했다. 하지만 여럿이 사는 세상에서는 사람마다 피치 못할 ‘사연’과 ‘이유’를 갖는다. 이제는 약발 떨어진 ‘편협한 정의’로는 흥행하기 힘들다.

2600년 전 소아시아의 노예였던 이솝은 부지런히 일해 자유를 샀다. 그는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나 모욕적인 노예생활을 견뎌야 했다. 아마 노예로서 눈꼴 신 자유민 베짱이의 놀이를 ‘언젠가 두고 보자’며 우화로 비꼬았을 것이다. 이솝의 말대로 우리의 세계도 ‘개미-베짱이’의 구조로 짜여 있었다. 그저 차가운 겨울에 구걸하다 굶어 죽는 베짱이로 처지지 말자 다짐하며 허리띠 졸라매고 ‘마른 수건 짜기’에 열중했다.

이 우화는 원래 근검절약의 찬양이 아니라 ‘정의의 용사’가 악당에게 주는 훈계였다. 개미는 “놀기를 원했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지 않던가. 자유를 맛 본 이솝도 ‘개미와 베짱이’의 세상을 벗어나 ‘꿀벌’과 ‘매미’가 말하는 ‘예술’과 ‘가치’ 있는 ‘인생’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개미가 정의였던 노예의 세계도 ‘꿀벌’과 ‘매미’라는 ‘사연’이 등장하면서 힘을 잃었다.

개미는 근검절약해서 모은 양식으로 호의호식했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니 문화적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개미는 부지런하지만 별 가치도 명성도 없었다. 심지어 꿀벌이나 소음 덩어리 매미보다 못했다. 사랑받고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던 개미는 억울하고 분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하루는 신전에 올라 자기의 억울함을 눈물로 호소했다.

“아폴로시여! 제가 하찮게 취급받고 있습니다! 부당한 명성을 누리는 꿀벌과 매미를 벌하시고 정의를 다시 세우소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 세상에 당당하게 서고 싶습니다.”

개미의 눈물어린 호소를 들은 아폴로가 개미에게 물었다. “개미여! 네가 모은 것을 이웃과 나누어 본 적이 있는가? 세상에 너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은 오직 너 하나뿐이다. 하지만 꿀벌을 보라! 기특한 노력으로 달콤한 꿀을 모아 모두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가!”

신의 반론을 들은 개미의 머릿속에는 굶다 얼어 죽은 베짱이가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가슴이 뜨끔한 순간이었다. 솟아오르는 양심을 꾹 누르고 베짱이의 사촌격인 매미를 비방했다.

개미는 “신이시여! 꿀벌이 미덕을 갖추었다면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음만 내다 죽어버리는 매미는 백해무익합니다!”라고 목소리 높여 항변했다.

그리스 신화는 개미보다 매미에 주목한다. 이솝이 주장하는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남의 것을 훔치던 농부가 벌을 받아 개미가 되었다고 한다. 음악의 신 뮤즈는 아직도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개미를 보며 한탄하며 말했다. “내가 음악을 처음으로 발명하였을 때, 너무나 행복해하며 먹고 마시는 것도 잊고 죽을 때까지 노래만 한 친구들이 있었네. 그 친구들의 후손이 바로 매미라네. 그들의 노래는 기쁨이고 삶 자체를 사르는 불꽃이기에 아름답다네.”

신의 설명을 듣고 신전을 물러났으나 개미는 매미의 예술적인 삶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뭔지 모를 매미는 잊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꿀벌같이 되면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 물론 다음날부터 개미가 집집마다 꿀을 배달한 것은 아니었다.

개미는 꿀 배달 대신 사실 자신이 꿀벌이라는 선전 전략을 채택했다. 개미의 선전은 18세기 네덜란드 출신 멘더빌의 『꿀벌의 우화』로 꽃핀다. 그는 사회 전체로 보면 탐욕이란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을 이루는 근간이라고 주장한다. 개미처럼 일하고 베짱이처럼 소비하면 사회적으로는 꿀벌의 사연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정의의 사도에서 이제는 꿀벌의 탈을 쓴 홍익(弘益) 개미로 바뀌는 대목이다.

하지만 개미와 꿀벌의 차이는 사회적 이익이 아닌, 일에 대한 태도였다. 꿀벌은 달콤한 꿀을 모으고 배달하는 일 자체를 즐기지만 개미는 미래의 달콤함을 위해 일한다. 개미에게 언제나 현재는 곧 일이기에 정작 바라던 미래가 와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일을 한다.

자, 이제 각자의 사연이 마련되었다. 개미는 놀기 위해 일하지만 계속 일만하고, 꿀벌은 일하는 활동 자체가 즐거움이다. 베짱이는 어리석게도 게으름을 피우다 굶어 죽고 매미는 예술혼을 불태우는 예술가다. 모든 사람들이 그저 자기의 인생의 사연 앞에 서있을 뿐이다.

골프에서 구멍에 공을 넣는 일이 중요하지만 구멍 속의 공은 골프라는 ‘사연’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매미에게 ‘사연’인 음악은 삶의 목적이고 기쁨이다.

꿀벌의 탈을 쓴 어떤 개미는 “노는 만큼 성공한다”고 말한다. ‘성공’을 위해서는 일보다 ‘노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에 ‘논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는 놀려고 돈 벌어서 조기에 은퇴했지만 또 돈 벌려고 아등바등 일만하는 갈 데 없는 홍익개미들의 이념이다.

즐거움과 기쁨이 목적인 어떤 매미는 말한다.

“놀았으면 성공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매미의 그런 당당함에 주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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