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2.02 16:44
이호영 철학박사(런던대)
대부분 동호회는 봄가을에 많이 싸우고 많이 깨진다. 독특한 댓글문화가 원인인데, 대부분 쓸 데 없는 자존심싸움을 시작하다 나중에는 댓글이 문제로 번져 서로 욕하다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장면과 짬뽕의 맛 대결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시작한다고 가정하자. 꼭 중간에 볶음밥이나 기스면 혹은 탕수육이 더 맛있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등장해서 토론은 삼천포로 샌다. 그러다 반주로 적합한 술을 말하는 족속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술을 말한 족속은 동호인을 가장한 업자라는 고발성 댓글로 유명(幽明)을 달리하고 논쟁은 비방전으로 발전한다. 서로 네가 공짜로 술 얻어먹으며 업자를 선전한다고 비방이 난무하다 동호회는 깨진다. 그러나 이런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전문적인 동호회에서 한 3년만 끈질기게 매일 활동하면 실력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뭐가 되도 될 수 있다.

2500년 전 공자도 동호회 운영을 하면서 ‘번개’를 즐겼다. 우리는 공자에 대한 엄격한 인상에 눌려 ‘번개’의 의미를 읽지 못했을 뿐이다. 동양 최고의 고전으로 일컫는 『논어』, 그리고 그 서두를 장식하는 ‘학이(學而)’, 게다가 그 장절이 막 처음 시작하는 곳에 등장하는 두 구절에 우리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공자의 일관된 철학 그대로 그는 먼저 배움의 즐거움을 언급했다. 그리고서 바로 등장하는 구절이 ‘친구들과의 모임’이다.(學而時習之 不亦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한 마디로 공자의 『논어』는 실력을 쌓아 고수가 되고, 취미를 같이하는 친구를 모아 번개를 치며 즐기자는 취지를 지닌 동호회 창립과 관리에 관한 지침서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기존에 ‘유교=예법’ 식으로 치장한 엄숙주의의 너울을 걷어 올릴 수만 있다면, 우리의 눈에는 더 많은 정보가 들어온다. 공자가 가르쳤다는 과목인 ‘육예(六藝)’를 한 번 보자. 시서예악어사(詩書禮樂御射)-. 멀리 돌아갈 필요 없다. 요즘말로 풀어볼까.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고(詩), 블로그나 페이스 북에 글 올리기(書), 사회적 기준에 맞추기(禮), 기타치기(樂), 운전하기(御), 게임하기(射)다. 그냥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옛날 과목만 고집하며 괜히 어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공자는 동호회 활동을 통해 “기쁘고”와 “즐겁다”라는 감정의 표현을 확실하게 한다. 재미없는 동호회를 누가 하겠는가? 누구든 친구들과 함께 관심분야를 즐기면 더 재미있는 것은 확실하다. 혼자 야구하고 농구하고 축구하면서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머리에 ‘꽃’을 꽂았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그래서 동호회의 목적은 공동의 관심분야를 같이 ‘즐기자는데’ 있고 공자의 생각도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인터넷이 없었을 때도 거의 매일 동아리에 동호회로 싸돌아다녔던 일을 생각하면 꼭 인터넷이 있어야만 동호회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사람이 사는 곳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끼리끼리 모여 서로의 관심사를 즐겁게 나누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보급된 인터넷은 양적, 질적으로 그 범위를 확장해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관심을 확인하고 실현할 길을 마련해 주었다.

인터넷이 만개해 온갖 언로가 다 터져있는 오늘날 인문학은 위기라고 한다.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린지 모르겠다. 만약 인문학이 지금까지 있었던 학문영역만을 말한다면 납골해서 용미리에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인문학적 관점이란 ‘인간’이라는 본문에 다는 ‘댓글’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인간이 시작된 이래 인문학은 위기를 맞아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댓글로 자기의 해석을 당당히 표현하는 오늘날의 인문학은 최고다. 아마 댓글 하나 써놓고 자기 댓글 이외의 것은 이단이라고 우기거나, 아르바이트 동원해서 게시판을 도배하는 무뢰배에게는 위기일 것이다.

동호회 지침서인 논어는 ‘기쁨’과 ‘즐거움’에만 머물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는 군자(人不知不溫, 不亦君子乎!)”를 든다. 군자는 친구들과는 즐겁게 인생의 목적을 실현해가는 인간적, 문화적인 멋쟁이다. 인문학 위기의 시기에 군자야말로 시인 이상(李箱)이 노래하듯 이전 인문학을 “봉쇄(封鎖)”해버리고 새로운 인문을 이끌 진정한 인문학자가 아니겠는가?

동호회 활동의 주요 거점이 되고 있는 인터넷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자기의 의견을 말한다. 환경으로 보자면 현실보다 훨씬 더 거칠고 더 살벌한 곳이다. 노약자 보호석도 임산부양보나 배려도 없으며 신분의 귀천도 따지지 않는 정글이다. 심지어 얼마 전 실명제조차도 위헌판정이 났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익명성은 기존의 유교적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송두리째 뿌리부터 흔든다. 지금 인터넷에서 중고등학생보다 두려운 존재는 초등학생이라고 할 정도다.

아무리 무질서한 밀림이라고 해도 질서를 부여하여 휘어잡지 못한다면 군자로서 부족하다. 먼저 군자라면 당연히 그동안 배우고 익혀 마스터한 실력으로 찌질한 소인들을 제압해야한다. 다음으로 견해를 제시할 때 동호회의 정론을 세우고 『고문상서』(古文尙書) 「대우모」(大禹謨)에서 말하듯 ‘중심을 잡고(允執闕中)’ 무리의 가운데에 서야 한다. 악성 댓글이나 비방이 무서워서 해야 할 말과 활동을 하지 못하고 댓글에 연연해서 울고 웃는다면 소인(小人)일 뿐이지 결코 자신의 일과 즐거움을 당당게 즐기는 군자는 되지 못한다. 즉 군자는 점잖은 사람이 아니라 점잖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진정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봄 밤에 벌어지는 파티. 군자 역시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기에 바빠야 옳다. 놀 때 제대로 노는 것도 바른 생활을 믿음으로 하는 군자의 행할 바다.

공자는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자기실현의 열매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기쁘기 위해서는 각자 실력을 닦고 벗들과 같이 나누며 즐기라고 말한다.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다.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고 수준 있는 동호회에서 한 3년만 끈질기게 매일 활동하면 될 수 있다.

동호회의 중심이 되어 회원들과 함께 즐기는 것은 군자가 마땅히 몸소 실천해야 할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군자 되기를 주저할 이유도 시간도 없다. 이제 우리는 오랜 동양의 전통, ‘제대로 즐기기’를 위해 동호회의 주소를 손에 들고 새로운 여행길에 주저없이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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