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2.03 11:31
눈이 가득 내린 남산의 산책로 모습이다. 눈은 순백과 청결의 이미지로부터 '씻다' '씻어내다'의 동사적 의미를 얻었다. 설욕(雪辱)이라는 한자 낱말이 그 좋은 예다.

눈이 애꿎다 할 것이다. 순백의 이미지로 청결함을 상징하는 제가 욕됨을 씻는다는 ‘설욕(雪辱)’이라는 낱말에 등장하니 속이 상할 법하다. 이 겨울 서울 등 중북부 지역에서는 눈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내린 눈이 워낙 적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겨울이 이제 다 갈 무렵에 새삼 눈을 떠올려본다.

구름에 섞인 물의 기운은 날씨가 차갑지 않을 경우 비로 내린다. 반대로 어느 정도 이하의 기온에 도달하면 얼어버린 결정체로 땅에 닿는다. 그를 눈이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雪(설)로 적는다. 비를 의미하는 雨(우)에 눈의 결정을 가리키는 아래 부분이 서로 합쳤다.

함박눈, 진눈개비 등 순우리말의 눈 표현이 많다. 이를 굳이 한자로 옮길 필요는 없다. 단지 눈에 수분의 함량이 높아 축축한 상태의 것을 습설(濕雪)로 적는 경우는 있다. 절기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적게 내리는 눈을 소설(小雪), 많이 내리는 눈을 대설(大雪)로도 적는다.

내리는 눈을 강설(降雪)로 이르고, 세차게 내리는 눈은 강설(强雪)로 표기한다. 함박눈의 형태로 짐작하는데, 그 양도 퍽 많아 하늘을 가득 채우며 내리는 눈은 장설(壯雪)이라고 한다. 재해에까지 이를 정도로 심하게 내리는 눈은 폭설(暴雪)이다.

그런 눈으로 급기야 피해가 도지면 설재(雪災)일 수 있고, 설화(雪禍)일 수 있다. 길이 막히는 정도를 넘어 인명의 피해까지 낳는 경우다. 예전의 왕조 시대 기록에는 설이(雪異)라고 적어 눈의 피해를 알리기도 했다. 모든 것이 너무 많아 넘치면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다.

그런 순백의 눈은 무엇인가를 씻는 데 쓰이기 마련이다. 물과 같은 세정(洗淨)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단어가 우선은 설욕(雪辱)이다. 제가 당한 욕됨을 씻는다는 뜻인데, 보통은 대상이 뚜렷하다. 그런 욕됨을 안긴 상대에게 앙갚음을 하는 행위다.

설한(雪恨)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제가 품은 한을 씻는다는 말이다. 역시 되돌려 주는 행위면서 일종의 복수다. 세설(洗雪)이라는 낱말도 보인다. 눈을 씻어낸다는 뜻은 아니다. 물로 씻고, 순백의 눈으로 또 씻어낸다는 의미다. 역시 남에게 당한 욕됨을 씻는 행위를 가리킨다.

청설(淸雪)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깨끗한 눈’으로 새기기 십상이지만, 실제 뜻은 앞의 세설(洗雪)과 같다. 원한이나 욕됨 등을 되갚는 일이다. 같은 맥락의 단어로는 보설(報雪)도 있다. 쾌설(快雪)은 쌓였던 울분이나 원한 등을 시원하게 씻어버리는 일이다.

우리의 용례는 별로 없으나 중국에서는 설치(雪恥)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초기 용례로는 <전국책(戰國策)>에 보원설치(報怨雪恥)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다는 뜻이다. 세설치욕(洗雪恥辱)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전란과 다툼이 극에 달한 환경에서는 자연스러운 말들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 규범과 사람 사이의 예절이 어엿한 사회라면 그리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원망, 원수, 원한, 치욕 등에 보복, 설욕, 설치 등이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가 어찌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나 우리 정치판의 분위기는 꼭 그렇다. 이를 악물고 본래 몸담았던 곳의 반대 진영으로 옮겨 간 사람들이 많다. 또 그런 사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정치판 자체를 원한과 보복의 감정적 이중주로 이끄는 이들도 문제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또 야당대로 감정적 싸움에 골몰한다. 그런 깜냥이니까 대한민국 정치는 늘 그 자리다. 우리가 정작 가야 할 길은 아주 멀고 험한데 말이다.

 

<한자 풀이>

雪 (눈 설): 눈. 흰색. 흰 것의 비유. 눈이 내리다. 희다. 고결하다. 씻다. 표명하다.

辱 (욕될 욕): 욕되다, 수치스럽다. 더럽히다, 욕되게 하다. 모욕을 당하다. 욕보이다. 무덥다. 황공하다. 거스르다. 치욕, 수치.

濕 (젖을 습, 나라 이름 합, 물 이름 답): 젖다. 축축하다. 마르다, 말리다. 낮추다. 스스로 비하하다. 습기. 물기. 자연 그대로의 것. 나라 이름(합). 물 이름(답).

 

<중국어&성어>

报(報)仇雪恨 bào chóu xuě hèn: 원수를 갚고 원한을 씻어낸다는 뜻. 자주 쓰는 성어다.

白雪阳(陽)春 bái xuě yáng chūn: 흰 눈과 따뜻한 봄. 그러나 전국시대 유행했던 아주 수준 높은 곡조를 가리킨다. 지금은 통속적이지 않은 고급스러운 예술이나 작품, 수준 등을 일컫는 말이다. 陽春白雪이라고 적어도 좋다.

风(風)雪交加 fēng xuě jiāo jiā: 바람과 눈이 겹쳐 닥치는 날씨. 험한 날씨나 환경 등을 일컫는 성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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